온라인 속의 눈빛

상냥함의 힘

by 새벽종 종Mu

그제, 그러니까 1월 14일에 온라인 학술회가 있었다.

한국문학과 종교학회.

박 선생님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재작년 가을에 이 학회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본과와 석사 전공이 국문학 쪽이고 박사 전공이 불교문헌문학이니 말이다.


그래서 재작년 12월에 부지런히 논문을 써서, 그 이듬해 즉 작년 1월 8일의 겨울 학술회에 참가했다. 당연히 오프라인 회의였다. 코로나 19 뉴스가 그 달 하순에 터졌으니....

수유역 알라딘서점 계단 벽에 걸린 시

그런데 비회원으로서 첫 참석이라선가, 분과토의 사간에 순서에 맞춰 발표하고 마치고 다른 이의 발표와 토론을 듣는 내내 좀 서걱거렸다. 왜냐하면 한 시공간에 모처럼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날 때까지 인간적으로 나눌 만한 그런 교류가 없어서였다. 발제를 하여도 이미 약속된 토론자 외엔 관심을 갖지도 질문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짜여진 식순에 시간적 한계도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그날의 회의 참석을 위해 바로 하루 전 날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던 참이었다. 게다가, 그전에 폭설이 내려 중국의 근무처에서 비행장까지 제대로나 갈 수 있을까, 혹시 예약한 비행기를 못 타는 거나 아닐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제시간에 비행기에 올라탔을 땐 마치 병사가 임무를 마치고 개선행진이라도 앞둔 것처럼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온신경을 기울여 달려와 참석했건만.... 어쩌면 저녁 회식 시간에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거기까진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아쉬운 맘 한 줄기 서리는 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유감스런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고두고 영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을 회의장에서 들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난 직후였다. 사회를 맡았던 이가 그나마 관심을 갖고 물어준 말이, 당신은 해외에 체류중인가, 라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걱정처럼 해 준 말이, 요즘 한국의 학계에서는 '모성, 여성성'이런 용어가 금기어라고, 몰라서였겠지만 나의 주제 선정이 시대 분위기상 착오였다는 것이다.


모성, 여성이란 용어 자체가 국내 연구 발표에서 언급하면 안 된다고?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정보였다. 한국의 교수가 그렇다니 그런가, 우선 억지로라도 수긍하고자 했지만, 내 논문이 이번 학술회의가 내건 대주제에 부합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자부했던 만큼, 그래서 많은 내용적 토론을 기대했던 만큼 심정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혹시, 연구가 부족하다, 논리에 결함이 있다ㅡ이러한 평가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으나, 국내 학계만의 시대적 금기어가 따로 있다니!

백 번 양보하여 일반 사회의 여론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겠다. 그런데, 어느 분야보다 이성적으로 객관과 중립의 사고방식을 유지해야 하는 학계에서 이렇게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고, 시기에 따라 엄정한 기준도 없이 편견을 적용할 것이라고는 예상한 적 없기에 말이다. 그러나 국내 학계의 동향이 그렇다니 아는 바 없는 나로서 뭐라 하겠는가. 그저 어안이 벙벙한 채 회의장을 나올 수밖에....


그렇다면, 무사히 제 시간에 잘 참석한 것에 의의를 두는 거지, 뭐.


그리고 딱 1년하고 엿새 뒤인 2021년 1월 14일에, 나는 또 이 학회가 개최하는 겨울 학술회에 논문을 보냈다. 발표를 하기로 한 것이다.


준비 단계에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겸한다는 통지를 받았고 선택이 가능하대서 나는 오프라인을 선택했다. 줌 앱 사용법은 얼추 알았지만, 살아온 습관상 현장 회의가 더 나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회의 날짜에 임박해서는 오프라인은 전면 취소되고, 전적으로 온라인 회의를 한다 했다. 내 선택 사항이 아니어서 다소 실망했지만 1년여의 코로나 19 사태로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게 된 터....그럼 그렇게 하지요.


회의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내 발표는 오후였지만 아침을 먹자마자 노트북부터 열고 회의에 접속했다.


점심 이후에는 노트북이 어쩐지 과부하인 듯해서 휴대폰으로 바꿔 켰다.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내가 속한 분과의 시작시간인 3시 30분이 되었다.


앞 순서 한 사람, 그리고 나. 내 뒤에 두 발언자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앞 차례에서 발제가 유달리 길었던 데다 그에 대한 토론도 길어져 시간이 많이 소비되었다.

사실 어떤 학술회의나 발언 시간이 초과하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것을 10분 정도로 축약하여 전하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발언자가 자기 의견을 전달하려는 열정에 넘쳐서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을 두 배 이상 써버리거나 하면 보통의 경우, 사회자의 기색에 난감하고 조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 분과는 이 무슨 행운이던가.

보기 드물게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인상의 사회자였다. 필요한 만큼 시간의 진행 상황을 간략히 전해주기는 해서, 시간초과에 대한 경각심을 참석자 스스로 느끼게는 했지만, 그뿐, 그 상황에 절대 자신의 감정을 얹지 않았다.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건지, 아님, 회의 진행의 경륜에서 숙달된 건지, 그녀에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바로 뒤를 이어 발언하게 된 나는 아무런 쫓김 없이 스스로 시간을 절약하며 논지를 전할 수가 있었다.


아, 그리고 사회자에게 감탄한 또 한 가지.ㅡ온기가 담뿍 묻어나는 눈동자.

사람들의 발언 하나하나에 진지하게 경청하는 그녀의 표정도 표정이지만, 앞뒤 발언자의 요지를 연결해 정리해주며 마치 직접 마주하듯이 영상 하나하나에 눈빛 격려를 전해주는 그녀의 마음씀은 정말 뜻밖이었다. 나는 이제 어떤 것보다 먼저 자제심이 앞서는 나이일 텐데도, 그녀가 보내주는 시선에 닿는 순간, 그 상냥한 눈빛에 마치 직접 마주보고서 가슴이 서로 통해진 듯한 전기가 찌릿 하고 느껴져오는 것이다. 세상에! 이게 가능해?


내 기억에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인터넷이란 그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기술 앞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소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한 자리에 모여 지척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말해도, 내가 하는 말이 과연 너에게 스며갈 것인가 ㅡ그 불확실성에 긴장하게 되는 게 소위 학술회였다. 적게는 몇 달 길게는 몇 십 년의 연구 결론을 가지고 달려왔는데... 다행히 동료지인이라도 있어 준다면 모를까, 자신의 순서가 끝날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는 게 당연지사다.


그런데 이제 그런 편치 않은 모임조차 쉽게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코로나19의 방역체계 하에서, 굳이 회의가 필요하면 어느 장소로 모일 게 아니라 화면을 마주하고 앉아야 한다. 무감한 기계 기술을 통해서 각자의 목소리, 각자의 모습을 보내야 한다.


과연 우리는 네트워크 기술 너머로 사람의 체온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전혀 모를 일이다. 예측이 불가한 상황이니 내심 불안감을 풀지 못한다.


그런데, 한 사람의 진심어린 시선이 영상을 통해 내게로 닿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보기 드물게 상냥한 이로구나. 그녀의 이름을 새겨두기로 했다.

잊지 말자. 숙명여대 영문과 박소진 교수.


그리고 또 하나, 내 마음이 풀릴 계기가 있었다. 다름 아니라, 작년에 들은, 요즘 국내 학회에서 여성성에 대한 토론은 배척받는다는 말. 이번에 다른 사람들 발제를 보니, 여성주의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금기라는둥의 말은 잘못된 정보였다. 작년에 내게 그런 조언을 한 교수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까지 단언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년의 선물처럼, 한 사람의 사회자로 인해 뜻밖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지한 토론이 전개되는 온라인 회의를 경험했다.

어찌 생각해도 신기하다. 통상의 예측이라면 대면접촉에서 교류,접촉의 가능성이 높을 텐데, 오히려 오프라인에서는 맛보기 힘들었던 감동과 안심을 올해의 온라인에서 맛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굳이 작년의 예만도 아니다. 대면회의가 생각보다 부주의하여 참석자에게 일종의 실망감을 안겼던 일, 일일이 꼽을 수도 없을 정도다.


한번은 내가 모처럼 베이징대학의 한 국제학술회에 참가했던 때였다. 그 때 겪은 불쾌한 일은 잊을 수가 없다.


한 일본인 여교수가 내가 속한 분과토의의 사회를 맡았는데, 바로 회의 시작 전까지도 친하게 얘기를 나눈 사이였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스스로 사회자의 책임에 너무 긴장한 탓인지, 내 발언 직전에 시계를 보면서 순간적인 착각을 한 것이 그만 내 발언이 너무 길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성급하다싶게 내 발언을 끊어 버렸다. 나로선 황당한 게, 예를 들어 발언 시간이 5분여 허락된다면 나는 2분도 채 안 되어 강제로 말을 마치게 되는 식이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학술회에서 이런 경우를 당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가슴이 서늘해진 일은 더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녀에게 일이 그렇게 되었음을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끝끝내 사과 한 마디도 안 하더라는 점이다.


그런 두서없는 회의도 겪어본 나로서는, 이번의 박소진 교수 같은 사회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이 날의 감동을 확대 해석하자면, 코로나19가 아무리 강대해도, 인간사회의 앞날에 희망의 빛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었다.


상냥함이야말로 희망이다.

그 마음이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대면 접촉과 비대면 연결, 이 둘의 차이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 경험이다.


모두들 우리의 생활이 비대면 사회로 되어 뭐든 악화일로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이런 것 아닐까. 대면 사회라 해도 친절과 배려가 없으면 인간 사이의 공기는 순식간에 각박해지는 것이다. 또 비대면이라 해도, 눈빛 하나 목소리 하나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하나로 이어준다.

결국은 어떤 마음인가가 핵심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핫팩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