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다움'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

유혹당한 것을 비판할 권리는 누구도 없다

by 새벽종 종Mu

#.부모는 왜 아기를 낳을까


아기를 꼭 낳아야 할까?

이런 고민이 시작된 원인은, 현재 한국사회가 평균적으로 자녀양육에 들이는 비용이 너무 과다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내 기억으론 내 나이 열한두 살 무렵, 일정한 철학도 세우지 않고 생활에 허덕이는 어른들, 자신의 감정으로 어린이를 대함에 뚜렷한 기준도 갖지 못한 어른들, 삶이 왜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 전해줄 생각이 없는, 그러면서 후계인 자기 직계 자녀를 포함한 주위 청소년에게 한사코 인색한 자신인 걸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무조건 잘난 체하는 그런 성인들을 보면서, 그런 어른들이 왜 굳이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애를 쓰는지, 아이 낳기에 대해 한번쯤 되짚어보지도 않는 굳어진 의식과 그런 사회에 의구심을 품었다.


애를 쓰는 건 허울이다.

아이가 생기면

부모다운 노력도 없다.


그런 어른들을 보았으니까.


워낙 악인이라서

혹은 지능이 모자라서

노력을 방치한 게 아니다.

자기 조절을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 중에 스스로 해소할 지혜는커녕 같은 어른에게 그런 내색을 숨기다 보니, 만만한 상대로 아이에게 자기 감정을 푼다.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겁도 많아 사회적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오직 자기 가정에서 약자만을 곯려댈 뿐이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고도 약자를 괴롭히며 화풀이할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다.


그런 소심하고도 악랄한 어른 캐릭터를 가까이 두고 보면서, 어린 나는 분개했던 것이다.


#. 엄마 노릇이 싫어졌거나 다른 방식을 택하고 싶었을 수도


오늘 나는,

힘도 안 쓰고 매듭 하나 지었다.

그것도 문자메시지 몇 개로.


일석이조( 一石二鸟)

한 사람과 대화하여 두 사람을 해결하다.


나와 상대는

첨부터 엄마 얘기만 계속 주고받았는데

가장 마지막에서 그 상대에게

한 방 날린 것이다.

알았어요.

상대의 대답.


40년,

오늘 문자 상대와 엄마 사이의 상호 영향력은 뭐라 이름 지을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둘의 가까움이

선한 영향력으로 확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네가 옳다에서

우리는 옳다로

어느 사이에

너만 옳다로


그러면서 엄마는 엄마다움을 잃어버렸다.

며느리에겐 그래도 일관되게 시어머니다왔는지?

(*한때 과도하게 열중한 건 보았는데 지금도 그런지?)


나는 묻지 않는다.

내게 느껴지는 건,

가끔 당신 자신 허전하여 눈이 짓무르게 우신다는 것.


그러나 그 눈은, 무엇을 어째서 잃었는지 망연할 뿐이다.


엄마는 그럴수록 자신의 내면을 혼란 속에 둔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해 볼 것이 있다.


누구라도

힘든 고비를 걷고 있을 때,

내 맘에 쏙 드는 한 사람이 나타나,

나랑만 친하면 즐거울 거예요, 하면서

기분 좋게 해 주면

자신이 조금 변한다한들 어떠랴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이성과의 스캔들도 아닌 터니 특별히 조심할 필요도 없는 데다, 또 가정을 이루고 삼십 년간 해온 엄마 노릇이란 알고 보면 정신적 보람 외에는 그다지 이익도 없는 거니까.


엄마도 그럴 수 있다.


90여 세의 엄마에게 30년 전이란 60세.

그 정도의 향락은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 귀에 좋은 말을 탐한 것 외에도 버젓하고 자랑스러운 명목.

며느리와 친하게 지내는 시어머니.


듣고 보기에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사실 딸인 나조차도

이후 엄마의 변화 속에

조심성 없이 내보이는

갖가지 모순들, 원인을 모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저 이해의 폭을 넓히는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엄마로서 노고한 세월을 아는데 이것마저 못한다 할 수는 없으니까.


여생을 하냥 모순덩어리로 채울 것인가... 혈육의 정이 앞서면 안타깝고 답답해진다. 그런데도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대화였는데...

어떻게 내 글자들이 하나씩 엄마의 심연 깊숙히 숨은 그 혼란에 가 닿을 수 있었지?


실마리의 끝을 잡은 느낌.

그렇다고 고령의 모친에게,

오늘의 이 발견을 얘기 나눌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냉정해서가 아니고.

남이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라는 뜻.


엄마 자신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때

먼저 말을 하지 않을까.


하긴, 그 사이에 나는 너무도 커버려서,

엄마가 이제와 지난일을 정리한다해도

그 말이 크게 소용될 것 같지도 않다.


다만 엄마에겐 일종의 인격성숙의 의례가 되겠지.

정신의 성장에 늦고 빠르고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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