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틈을 주지 않고 귀에 담는다.
어젯밤엔, 직장도 잃고 이혼도 당하고 당장 머물 데가 필요해 고시텔에 숙소를 정했다가 천생배필을 만난 남자의 고백을 들었다.
오늘 밤엔 한 청년의 기억이다.
말이 고시원이지 아주 시설이 낡은 건물에 입주해 살다가 알게 된 옆방 할머니가, 매일 밤이면 아들한테 전화해 같이 살고 싶다고 우는데, 오히려 매정한 며느리는 할머니 방세가 세 달이나 밀렸다는 전화를 받고는, (고시원 사장이 지레 나서서 혹여 사정이 있으면 방세 밀려도 겨울까지는 더 계시도록 하겠다고 덧붙였음에도)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냥 나가시라고 해요!"ㅡ라고 했다고.
그날로 할머니는 바리바리 자잘한 짐을 싸들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할머니가 떠나고 두세 달 뒤인가, 우리 엄마가 가신 곳 어디인지 알 수 있냐고, 아들이 찾아와서 우는 걸 보았다고...
그렇게 울기도 하는 아들이란 걸 할머니는 알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렇게 아이처럼 졸라댔겠지.
나 너희랑 같이 살고 싶어.
그래도 같이 살 수 없는 데엔 사정이 있었겠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선적인 하나의 해석으로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내가 다 시비를 가려야겠다고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정도 잘 모르면서.
관련이 있는듯 없는듯 저절로 이어지는 상념에 스스로 도리질을 하면서 내 귀는 다시, 등교길에 칼 한 자루를 따로 준비한 적 있다는 또 한 청년의 기억을 따라간다.
청소년 시절 왕따 피해가 지속되면서, 칼 한 자루를 가방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다행히 일진 친구의 기지 있는 도움으로 '칼'을 빼드는 극한의 순간은 모면했다고.
그날 밤, 아들도 내 앞에서 칼 한 자루를 샀다.
순간 가슴이 덜컥 했지만 말릴 일은 아니다.ㅡ고 생각한 나, 아들의 가방에 칼이 넣어지는 걸 지켜본다.
중국 쩌지앙성, 남해 보타산 여행길이었다.
조우산과 보타산을 오가는 배 시간이 정해져 있어, 항구에 도착한 오후의 일정이 갑작스럽게 비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바다 건너 섬인 보타산(普陀山)은 다음 날로 미루고, 조우산(舟山) 포구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래서 느긋하게 근처 심청과 연결된 공원 한 곳을 돌고 포구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했는데, 두 번째 문제에 봉착했다.
뜻밖에도, 숙소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텔 직원들이 하나 같이 거절하면서, 우리가 중국 국적이 아닌 외국인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아, 그 당시 나는 참 가난했다. 모자 함께 공부를 지속한 댓가였다고나 할까. 그 여름 벼르고 별러서 나온 여행이지만, 가능하다면 아껴써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이의 묵계였다.
여행 중 교통비, 식비는 필수이고, 아낄 거라곤 숙박료인데... 웬걸, (항조우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으로 )나름 비상시기인 당시, 그 지역에서는 외국인은 무조건 하룻밤 십만 원도 훨씬 넘는 4성 5성급 호텔에만 묵어야 한다는 행정명령이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돈을 도저히 그렇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골목길을 따라 규모가 작은 호텔까지 하나하나 입실이 가능한지를 물어갔으나 한결같은 대답. 비싼 호텔로 가세요.
그런데 딱 한 곳에서,
"당신들을 이 호텔에 받아줄 순 없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숙박료가 그리 비싸니 당신들이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내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 집 방에서 무료로 묵으십시오. "
혼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남자가 이렇게 제안하는 게 아닌가.
"정말요? 그럼 퇴근 시간이 몇 시죠?"
우리는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생겼음에 안도를 하고 그 시간까지 밖에서 기다리기 위하여 다시 해안가로 내려왔다.
저물녘, 광장무( 广场舞)를 하는 바닷가 주민들, 가족들과 저녁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 큰 도로를 타고 고층 건물의 호텔들이 늘비하고 그 네온사인이 화려했지만, 왠지 휴양지의 느낌보다는 일상의 냄새가 더욱 물씬한 해안이 우리 모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 평화로움에 되살아난 여행자의 기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다. 산책 나왔던 사람들도 하나둘 귀가하고, 우리 모자는 더이상 손님도 없어 그냥 앉아도 뭐라 하지 않는 노천 카페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침묵에 잠기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밤이 깊어가는데, 지붕이 없는 길가에 앉아 있다는 건, 아들을 위해서도 절대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위험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비싸더라도 그냥 호텔에 묵는 게 나은 게 아닐까.
만에 하나 집에 데려가겠단 약속이 속임수이고 우리가 유인되는 거라면?
여행지임에도 아직 미정인 숙소, 누군가의 선의로 제안된 하나의 선택지조차도, 그곳이 정작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불안이 어둠 속에서 엄습해왔다.
"아들, 어떡할까?"
내 한 마디에, 나랑 똑같은 걱정에 잠겨 있었던 듯,
나를 마주보는 아들의 표정이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다.
왜 아니겠는가.
나름 치안이 잘 된 편이라고는 하나, 한편으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인간 장기 매매단이며 환한 대낮에 사람을 끌고갔다는 대담한 납치범에 대한 뉴스...
만약 우리가 따라갔는데 그런 소굴이라면? 가설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만일을 모르니 호텔에 묵는 게 낫지 않을까?"
엄마는 점점 가슴이 떨려 뒤늦게야 돈 쓸 결심을 하는데...
"아냐, 그 아저씨네로 가자."
최후에 아들은 믿음의 패를 집는다. 아들의 감을 믿고 일어섰다.
그리고, 퇴근 시간을 말해준 아저씨가 있는 건물로 꺽어지는 길입구에서 모자는 잡화점에 들어갔다. 칫솔과 치약 수건 등 하룻밤을 자는데 필수품을 살 필요가 있어서였다. 내 거 먼저 계산하고, 이어서 다음 차례인 아들이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놓는 걸 보고 있는데 작은 과도 한 자루가 끼어 있었다.
경악했다. 찰나였지만 복잡하게 회전하던 생각들...
아들이 칼을 사는 것이다! 어떤 대비책으로써의 칼이라니! 이 모험을 잘 견뎌낼 것인가!
아들의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비장했다.
긴장 속에 칼 한 자루를 믿으며, 아저씨가 안내하는 아파트로 들어갔던 그 밤. 여태 소상하게 기억난다. 침대에 눕기 직전까지 일말의 경계심을 풀지 못했던 나, 그래서 집주인과의 대화도 평소와 달리 건성이었다. 입장을 바꿔 말하면, 다시없이 친절한 이국의 은인은 내게 친절했던 만큼 의심만 잔뜩 샀던 셈이다.
그러나, 선량한 조우산 아저씨는 화를 내지 않았다. 식구라고는 7살 초등생 남자애 하나 있었다. 초등생 아들은 금세 나의 아들과 친해져, 엄지 손가락보다도 큰 유리구슬 두 개를 우리에게 선물로 건넸다. 아마 그 애의 보물 1,2호였을 것이다.
아이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집의 안방을 내주었다, 옷을 갈아 입으며 둘러보니, 방안엔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상장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아이의 상장으로 눅어진 마음, 생각보다 잠을 푹 잤다.
이튿날 아침, 그집을 나올 때는 너무 고마워서, 얼마간의 사례라도 하려 했으나 남자는 돈을 받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사심 없는 인정이고 친절이었던 것이다.
그집 근처의 골목 거리, 허름한 동네 식당, 아침 햇살 아래서, 내가 사는 마을처럼 한결 친숙하게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극한의 위험을 경계한다고 칼까지 품고 들어간 호랑이 소굴(?)이, 사실은 드물게 마음 선량한 인간의 집이었던 게 밝혀진 직후이니...간밤을 무사히 넘겼다는 안심에 더해, 기적같은 친절을 만났던 행운의 실감까지, 모자의 발걸음은 다시 없이 가벼워졌다.
오전 배를 타고 보타산에 들어가, 인파에 섞여 길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관세음보살상의 발치 아래 멈췄을 땐, 불교 연구가로서 약간의 감회가 없을 수 없었지만, 그 일정을 끝으로 항조우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위에서 계속 내 뇌리에 맴돈 사물은 "구슬과 단도"였다.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극적 요소가 풍부한 한바탕 사건이었다. 이러니 인간 세상은, 인간 심성의 극과 극이 아무렇지 않게 혼재된 채 표현되는 정녕 요지경 같은 곳이라 할밖에 ㅡ
여행에서 돌아와 선반 위에 유리구슬을 올려 놓고 한참씩 바라보곤 했다.
그날 아들이 사들었던 칼은 과일 깎는 데 그만이어서 한참을 잘 썼는데, 여행가방에 넣고 중국 국내의 철도여행을 하다가 산시성 오대산 가까운 어느 역에서 위험물이라고 압수되었다.
그저 과도일 뿐인데, 나는 속으로 몹시 아까워했다.
지금도 가끔 어젯밤의 꿈처럼, 어둠 속에 우리 모자가 앉아 있던 그날밤 해변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절대 잊어선 안 될 소중한 추억임에도 내내 미안한 맘이 따라 붙는 것은, 타인의 친절 앞에서 양극의 저울질을 멈추지 않았던 나의 불안했던 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