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라디오 FM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by 새벽종 종Mu

늘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너무 사소하여, 가다가 멈추면 그대로 잊으라는 듯.

아니, 사소함으로 가볍게 쌓이노라면, 어느덧 그 무게를 감당하게도 될 거라는 인생의 깊은 의도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새 학기 반이 나뉘고 새 친구를 사귈 때, 어떤 사소한 이유가 나를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 혹은 가지런한 앞머리...


대학에 들어가 그저 그런 남학생을 하나뿐인 남자 친구로 들일 때도 그랬다. 기껏 내가 모르는 고문(古文) 지식 하나로 나는 그 남학생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을 알았고, 어쩌면 그게 다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왜 헤어져 아무 일 없이 오랜 세월이 지나버린 터에, 엉뚱한 것에서 연상작용이라도 일으키듯,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으로 옛사람을 떠올릴까. ㅡ혹시, 인연의 원뜻은 이다지도 겸손하고 선량하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일까. 그런 새깃털 같은 기억만 남겨 다시는 내 마음을 베이게 하지 않겠다는 듯이.


문인(文人)의 연애편지를 받아 어디로 달아날까 숨겨 간직하던 계절이 있었다.

봄이었고, 그의 글씨는 바람 타고 날아오는 노오란 해바라기의 씨앗들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연애편지와 상관없이 수묵화 같은 꿈을 꾸었다. 물회색 승복을 입은 노스님이 앉아 있고, 내게 뭔가 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저만치서 달력을 넘기고 있었다. 현실과 아무 상관없지만 현실보다도 생생했던 꿈의 장면 탓인지, 그 해 봄은 물에 풀린 잿빛으로 담담할 뿐, 도저히 들뜰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연둣빛 환희 속에 톡톡톡 튈 것 같은 문인의 손편지, 내게는 아직 잊히지 않은 지난날의 사소함이다.


오늘, 미술 시간.

누군가 스위스 FM 라디오 방송을 틀어줬다.

그림 그리며 음악을 듣는 건 어떠냐고...

그런데 웬 스위스 방송?

국내 방송은 DJ 말소리가 많이 끼어들어서 해외 방송을 찾은 거라고...

그렇다 해도, 그 많은 나라 중 스위스라니, 나는 이후, 스위스와 오늘의 미술시간과, 함께 그림을 그리다 홀연 FM방송을 켜 준 이 수강생 J를 연달아 떠올리게 될지도...


어쨌든, 오늘 이 시간의 새로운 사소함으로 하여, 지나간 시간의 어느 새털처럼 가벼워진 기억들이 불러일으켜졌다. 마치 바람결에 풀썩 일어나는 가벼운 먼지알갱이들처럼.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

그것은 곱고 고운 먼지 한 알

마음 구석에 떨어트려 두고

날아가는 새 울음소리.

희미해져도 언제까지나 그 만큼인 네 기억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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