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의 마지막 일요일
하늘이 쾌청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자주 내려서 공기 중의 먼지를 다 씻어내렸다.
옥상 위로 햇빛이 가득하고, 몇 개 되지 않는 화분들 위로 초록 잎들이 조촐하나마 생명끼리 나누는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새 아침입니다!
#. 골목길
골목길 따라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에 가서 쌀 한 봉지 작은 것으로 사서 날랐다.
그리고는 다시 그 가게에 가서 부라보콘을 샀다. 햇살 좋은 일요일에 몇 걸음이라도 걸으려고.
빌라와 아파트 담장 사이로 난 사잇길을 걷다 보니 산밑, 호젓한 나무 벤치가 나타났다.
거기에 앉았다.
나무로 가려진 저편 벤치에서는 누군가가 계속 국내 정치와 백신 개발에 대한 얘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멍한 채로 브라보콘 하나를 다 먹은 다음, 휴대폰을 켜고 SNS로 받아놓은 중국 학생들의 작문을 검사했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벌써 며칠째 여남은 편씩 읽어내고 있는 중.
'지치도록' 뭘 한다는 게 싫은 날.
일요일이어서인가?
이제 검사 안 한 작문이 몇 편 안 남았지만 그만 접어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부드럽게 풀린 하얀 구름이 내 마음을 다사롭게 해 준다.
#. 쌀국수
햇빛은 반나절 반짝하고 이젠 잔뜩 비구름이다.
쌀국수를 끓여서 거기에 토마토 몇 조각 빠트려 먹기로 했다.
국수 그릇은 중앙이고, 탁자 귀퉁이에는 유튜브 채널을 켠 휴대폰이 눕혀 있다.
늘 다니던 길인데, 소복 입은 할머니, 전등이 아닌 지등(纸灯)이 내걸린 시장, 음침한 시선들, ㅡ유령 시장을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사막이 있는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 수집한 전설에도 유령 시장이 나왔는데...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ㅡ양치기 목동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양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이제껏 들어본 적도 없는) 성(城)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니, 번화한 시장 거리가 나타났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가게문이 열린 거며 진열된 물건들이며 모든 것이 방금까지 장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는...
쌀국수가 아주 맛있는 건 아니지만, 밀가루 면처럼 쉬 질리지 않길레 가끔씩 먹는다.
지금 이걸 먹고 나면 보내기 아까운 5월의 마지막 일요일 저녁인 것이다. 부러 천천히 먹으며 느긋하게 굴어본다.
창밖으론 갑자기 후드득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쁘지 않아, 젊은날의 감수성을 불러올 것 같은 이런 날씨.
혼자 되뇐다.
그 사이 무서운 이야기는 다른 파트로 이어지고ㅡ
한 청년이 동네 뒷산에서 그만 길을 잃고 저녁 어둠에, 안개에 한없이 헤매다가,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 말에 할아버지 오두막에 들어가 앉았는데, 방 한쪽 벽의 자물쇠를 채운 문 너머에 할아버지가 암시하는ㅡ '영수'라고 했다ㅡ어떤 존재가 있는지, 자꾸 덜컹이고, 불안하고, 할아버지는 소리치고... 청년은 냅다 도망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때 다가오는 기척이! 소스라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하산하는 등산객 서넛에게 발견되어 깨어났다고.
그리고 아까의 오두막 자리로 가보니, 오두막 대신 두 개의 봉분이 있고 한쪽 묘비석에 정말 영수란 이름이 새겨져 있더라고.
문득, 내가 사둔 30권 <태평광기>가 생각났다.
#. <태평광기(太平广记)>
중국에서의 일은 이번 학기로 마치게 되었다.
이 결정과 함께 중국 아파트에 놓고 온 책들을 어떻게 우송시키나, 가져올 것과 놓고 올 것을 어떻게 추리나...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태평광기> 시리즈는 놓고 오자.
가장 먼저 추려진 책.
실은 너무 읽고 싶어, 미덥지 않은 경로의 출판물인 걸 알고도 샀던 것이기에, 예전부터 때가 되면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의 무수한 신비...
무덤 안은 멋진 저택이었고, 이미 죽어있는 무덤 속의 여인은 나의 아리따운 연인인 것이다.
어제는 이집트에 기독교 전교를 위해 가 있는 지인과 문자... 자신이 특별히 내게 선물한 성경책 얘기를 하는데, 아차! 성경책도 거기 있네! 가져와야 할 책이 또 한 권 늘어났다.
깜박 잊고 있던 바다 건너의 책들이 이 여름, 파도를 타고 내게까지 무사히 당도해 주기를...
지인은 예수님을 믿으니 성경책만 기도해줄 것이고, 나머지 책 상자의 안전 우송은 결국 내 책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