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

토마토

by 새벽종 종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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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는 여기 산지(产地) 거라 싱싱하대요.

어머나, 나 토마토 정말 좋아하는데..

오랜만의 나들이.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 살면서 한때 내가 많이 신세 진 은인이다.

그 선배가 심경의 변화가 몇 번 있었는지, 하필이면 그때쯤 내가 신세를 지지 않을 만해져서인지 선배에게 조금은 밀쳐지는 형태로 4,5년.

그런데 그렇게 뜨악한 사이였던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번에 둘의 만남은 유쾌하달까, 마음이 아주 흡족했다.

거기다 저녁에 헤어질 때는 토마토까지 한 아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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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거니 나만 먹어야지.

이렇게 다짐을 몇 번이고 했건만.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이 한마디에, 어른 주먹만 한 빨간 토마토를 담아 들고 쪼르르 달려가 변명한다.

요즘 기운이 통 없어서요..

저런.


둘이 뭔 얘기를 하다가 멈춘 사이. 나는 문득 어느 해 여름이 생각난다.


통장 잔고가 0원이 되었어요. 아이가 고등학교를 마친 그 해 8월인데 대학은 합격했는데... 거짓말같이 때를 맞추기나 한 듯이 통장이 텅 비더라고요.

그랬어? 그래서?

어쨌든 잘 헤쳐 나왔어요.


아아, 돈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돈이 하나도 남지 않은 그 해 여름의 엄마, 그 엄마를 따르는 아들. 그때 그 상황은 분명 뒤죽박죽 어설픈 모험의 끝장이라고나 할지... 그런데 생각보다 씩씩한 맘으로 그 끝매듭을 지었던 기억.


아들은 그렇게까진 몰라요.

아니, 이제 와서 알려줘도 이해하지 못해요. 오히려 대책 없는 엄마라고 비난하죠.

자식들은 엄마 믿고 사니 모르지. 학생 때 공부만 하고 다른 데 관심 쓸 틈이 있나...


지금은 세 아들 효도를 받고 지내지만.... 나도 참 힘들었어. 아들들 면회 한번 안 갔으니까. 아들들이 그러지. 군생활에 엄마가 면회 한번 안 온 건 자기들밖에 없을 거라고. 애들 아버지는 재산 다 말아먹고 죽고, 나는 돈을 어떻게 버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때는 남의집살이(가정부) 해도 월급이 겨우 7천 원이었어. 그걸 두 달치를 합쳐야, 막내 고등학교 학비를 댈 수 있으니, 오늘 한 끼 먹으면 내일은 뭘 먹나, 걱정스러운 나날이었어. 군대에 가 있는 사람은 그래도 그런 걱정 안 해도 되잖아. 거기 있는 니 살이가 나보다 낫다. 먹는 거 입는 거, 잠자는 거, 나라에서 다 해주니까.... 내가 하도 죽겠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큰아들이 군대 가고 그다음에 둘째가 이어서 가고, 오히려 한결 안심이더라고.


할머니의 얘기,

잔고가 거짓말처럼 0원이었던 그런 날이 있었다는 나의 얘기를 듣고, 옛 생각이 나신 모양.

분명 겪었지만 뒤돌아보면 그게 꿈이지 싶다.


집에 돌아와서 토마토가 아직 가득한 상자를 본다.


#.

토마토가 많으니 왠지 기쁘다.

사실 싱싱한 거에 비해서 맛은 별로다, 너무 밍밍하다.

햇빛보다 빗물을 많이 먹고 자란 건지...

그래도 잘 익은 게 모처럼 수북이 있으니 기분 좋다.

왜 골목길을 다니는 야채 트럭 위의 토마토들은 하나같이 푸르뎅뎅한지... 당최 사고 싶지가 않다.

(멀리 시장에 가재도 많이 사 오려면 너무 힘이 드니 엄두가 안 나, 별로 내키지 않는 인터넷 쇼핑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바로 며칠 전에도 트럭 가득 전혀 익지도 않은 토마토 더미를 보고 속으로 막 화가 났던 나다.

아저씨, 너무 한 거 아녜요!

그날따라 정말 토마토가 먹고 싶었는데.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생겼다. 선배가 집 앞까지 실어다 주었다. 원하던 대로 빨간 토마토가 생겨서 그날부터 참 기쁘다. 아마도 당분간 계속 이 기쁨이 유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