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멧돼지와 영화관

나팔꽃 2

by 새벽종 종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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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아침.

나팔꽃이 만발했다.

피어있는 꽃을 일일이 세어봤다. 모두 합해 15송이.

굉장한 아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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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외식.

몇 달씩 휴업했던 동네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는데, 다리 수술을 마쳤다는 사장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우리 모두 걱정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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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해외 뉴스에서 귀여운 사건을 접했다.

홍콩 지하철 안 의자 위에서 혼자 쉬고 있는 어린 멧돼지. 지하철을 타고 다리를 건너 홍콩 앞바다의

섬에까지 당도했다고. 심지어 중간에 환승도 했단다!

설명에 따르면 야산에서 엄마 멧돼지를 잃고 헤매던 끝에 저도 모르게 지하철을 탄 것 같다고, 마침 사람이 뜸한 시간이었던지 인간계에 별 탈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마지막엔, 멧돼지 보호단체 사람들이 달려와 아기 멧돼지를 사로잡아서 야산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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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크건 작건 홍콩 뉴스를 읽으면 당연한 것처럼 아들이 생각난다.

'아들, 귀여운 멧돼지 이야기!'

캡처해 전송.


얼마쯤 지났을까.

'엄마, 오늘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요. 오늘은 통화 못하겠어요. 내일 해요. '

문득 휴대폰을 들어보니, 아들에게서 SNS 문자가 하나 와 있다.

아들은 오늘 저녁 무슨 영화를 볼까?

아들과 통화할 때 물어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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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 멈춰 서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 바람에 눈이 떠진 아기 멧돼지는 열린 문으로 걸어 나옵니다.

앞에 사람이 걸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저 앞에도, 조금 뒤에도 사람들이 걷고 있었지만 아무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아기 멧돼지를 못 보았거나, 보아도 강아지쯤으로 여겼을 테지요. 아니, 돼지 종이란 걸 알아챘어도 누군가가 기르는 애완동물로 여겼겠지요.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코 앞에서 걷고 있는 다리의 주인입니다.

다리의 주인은 또, 멧돼지가 하도 태연히 걸으니, 앞이나 뒤의 누군가가 주인이겠지, 심드렁하게 넘겼을 테고요.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인간계에는 각양각색의 애완동물이 유행하는 추세입니다.

아무튼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걸음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아 따라 걸을 만했습니다.

더 좋았던 건, 멈춰 선 곳이 적당히 어둡고 푹신한 의자도 있고, 까무룩 잠이 들다 눈을 떠보면 빛이 나는 곳에서는 하늘의 움직임도 보이고 소리도 울려 나오고...., 그러나 사방이 조용한 게 왠지 별세계의 일을 꿈으로 꾸고 있는 것 같은.

잠을 자다 깬 건지, 잠을 자다 꿈을 꾼 건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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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기 멧돼지는 엄마 멧돼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구구구, 내 새끼.

흐흡, 엄마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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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럽게 그늘을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잎이 생각보다 너무 작네.

옥에 티라고 불만사항을 중얼거리지만, 어쩌면 잎이 작은 것은 영양 부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와 오늘은 꽃송이도 안 보이고....

밤새 제각각으로 뻗어 난 덩굴 키는 또 자란 것 같은데, 잎들이 작아진 이상 창문의 그늘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하긴, 많지 않은 흙 알갱이들에 뿌리내리고, 열 다섯 송이가 최선이었는지도 모르지....


미안해진 마음에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으려니, 새삼 궁금해진다.

그날 아기 멧돼지가 본 영화는 무엇일까,

어쩌면 나팔꽃 덩굴에 귀 기울이면 알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