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생각나는 해바라기 소녀

폴리안나가 되고 싶어

by 새벽종 종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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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한 그날의 장면,

뇌리에서 그림책 책장처럼 넘겨진다.


내 인생의 하드타임에 자주 만나던 동화작가 친구가 있었다.

작가로서 출발은 내가 한두 해 먼저였지만, 당시 그녀는 현역이었고 나는 거의 퇴역이었다. 무엇에도 흥이 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작가 친구와 교외 나들이를 하기로 한 그날은 하필 거센 비바람이 불어댔다.

그녀의 차는 스포츠카처럼 멋지나 오래되고 낡아서 기후 불순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모처럼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걱정스러운 기분이었다. 차주인인 그녀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이거, 여기서 그만 출발하지 않기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온 친구의 표정에도 나와 똑같은 망설임이 보였다. 굵은 소나기야 그렇다지만 강풍이 겹쳐 어른들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 우산이 뒤집어져 꽉 잡지 않으면 날아갈 것 같았다. 아들이랑 같이 쓰고 있던 우산이어서 옷이 젖어가고 그만큼 마음도 착잡해지고....

그런데, 반전이 있었으니,

까르르.

어린 아들의 즐거운 웃음이었다.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지는 게 너무나 신기해서 웃음이 터진 것이다.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에 초조해지고 있던 나로선 전혀 생각 못한 ! 난 그때 어른과 아이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깜짝 놀라는 기분이었다.

아마 친구도 그랬을 것이다.

걱정과 주저로 머뭇거리던 두 여자는 아이의 웃음을 신호로 갑자기 세상이 유쾌해졌다.

차가 전진하자, 아이는 또 깔깔대기 시작했다.

앞창 와이퍼에 끼워둔 두 개의 흰 장갑이 좌우로 흔들며 손짓하는 게 재미있어서 웃는 것이다.

그게, 와이퍼가 너무 닳아서 갈아 끼는 대신 장갑을 끼운 거야.

그 말에는 새 차를 구입하지 못하는 친구의 시름이 섞였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어린이에게 그런 내막쯤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차가 자꾸 늙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친구, 아이가 좋아하니 덩달아 기뻐진다.

그래, 장갑을 끼우니 두 개의 손 같지? 이모 아이디어가 성공했네!

그날, 비를 뚫고 교외로 향하던 빗속의 전진은, 어린이가 가르쳐준 기쁨에 두 여자가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우던 특별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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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지내다 문득 반가워지는 책.

<해바라기 소녀 >ㅡ'폴리안나 '라는 소녀 주인공을 요샛말로 긍정주의의 아이콘으로 부각한 소설이다.


소녀의 특징이라면, 돌아가신 아빠가 가르쳐준 '기쁨 찾기 게임'을 자신이 마주치는 불편한 상황에 한사코 적용하는 진지함.

기쁨을 찾아낼 수 없는 일에서 기뻐할 일을 찾아내면 게임에 승리자가 된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운명의 불운 같은 큰 일까지 뭐든 상관없이.

그런데 누가 이 바보 같은 놀이를 하자 할 것인가. 고아나 다를 바 없이 된 처지의 폴리안나를 마지못해 받아준 이모의 저택에서의 첫날의 게임은 당연히 소녀 혼자서 하는 게임이었다. 자꾸 슬퍼지고 외로워지려는 허약한 자신을 이기려는 안간힘과도 같은 일종의 생명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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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열흘 전만 해도, 나는 내 나라가 아닌 곳에 내가 쓰고 입고 덮던 살림살이며 의복이며 새 이불 등과 이별하는 것이 애달팠다. 두고두고 읽으리라고 모아둔 책도 반은 버리게 되니 마음이 그저 가벼울 수가 없었다. 물건들에 들인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내 것이라 여기던 것들과 헤어지는 자체에 감상이 착잡했다. 한마디로 이사 스트레스를 받은 거였다.


그런데 그 어디쯤에선가, 스트레스로 꽉 찬 내 마음에 틈이 생기고 한 줄기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힘든 이사를 네 대신 다른 사람이 도와주고 있잖아. 고맙지 않니?

딴은 그렇다.

이번 이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모든 걸 남을 시켜도 되는 경제 귀족이 아닌 이상, 현재의 나로선 절대 꿈꿀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셈이다. 생각이 여기에 닿자, 나도 모르게 가슴 안이 환해지면서, 일체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물건들과 강제적인 이별을 하는 것 같아 내내 불안하던 기분이 사라지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정말 복 많은 귀부인처럼 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새삼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