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앰뷸런스에게 차로를 양보하기도 하며, 연인에게 저녁 메뉴 선택을 양보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양보를 강요받기도 한다.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동생에게 양보할 것을 부모로부터 강요받기도 하고, 연차가 찬 회사 선배를 위해 진급을 양보할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과연 내가 지금 양보하는 것이 맞나? 우리는 살면서 한 번 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금 자신이 양보의 미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리숙하게 호구 잡히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우리는 ‘양보’라는 이름으로 굴종적이게 행동하기도 하고, 반대로 ‘굴종’이라는 핑계로 양보를 하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우선, 양보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내가 나에게 양보한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듯, 양보는 양보를 하는 사람과 양보를 받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양보의 기준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질 수도 없고, 또 상대에게만 초점이 맞춰질 수도 없다. 즉, 무조건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도 양보가 아니며, 또 무조건 상대에게 맞추는 것도 양보가 아니다.
양보는 나와 상대를 넘어선다. 양보는 ‘우리’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그 관계에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친구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양보가 아니라, 우정을 더욱 돈독히 만드는 것이 양보이다. 연인의 기분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양보가 아니라,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것이 양보이다.
양보는 양보하는 사람과 양보를 받는 사람, 이 둘마저 넘어선다. 양보는 이 두 사람이 소속된 공동체까지 확장되어 영향을 미친다.
양보를 한다는 것은, 노약자가 어려움 없이 교통을 이용하는 사회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양보를 한다는 것은, 앰뷸런스에 탄 환자가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양보의 기준은 ‘공동선’이다. 공동선은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도 아니고, 또 자신의 것을 무조건 고수하는 아집도 아니다.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 공동체를 위한 행동, 이것이 바로 양보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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