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너 여기서 모해?"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공원에서 삽질을 하는 중 대학원 동문을 마주쳤다.
그것도 왜 하필 Alicia
금발로 염색을 한듯한 엘리샤는 실크소재의 검정색 투피스에
아이스라떼를 쥐고
공원을 가로질러 근처 건축사 오피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엘리샤가 선글라스 넘어 휘둥그레진 눈을 하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조경 봉사 같은 거 하는 거야?”
"아니 나 여기서 일해. 공원 관리일 “
“아... 재밌겠네^^”
가식적인ㄴ
디자인 스튜디오 수업에서도 뭔가 안 맞아 어울리지도 않았던 엘리샤
일 년 전만 해도 나도 얘만큼 올 블랙에 점잖을 떠는 옷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오늘 난 진흙이 잔뜩 묻은 옷차림에 삽을 들고
바지 한쪽엔 키를 주렁주렁 달고
오전 10시부터 이미 땀범벅이 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과거 지인들이 보면 놀랠 만도 한 내 모습
차라리 삽질이나 더해서
쥐구멍 같은 거라도 나왔음 했다 ㅠㅠ
오피스에서 화이트 컬러 일만 해봐 공원일이 처음엔 매우 어려웠는데
시간이 지나며
노동에 몸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니
정신적인 부분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중 자존심은 가장 악질로
날 아주 오래 괴롭혔다.
낙엽을 뒤집어쓴 차림으로 쓰레기, 잡동사니로 가득한 큰 카트를 밀며 공원을 돌아다니 때
나의 머릿속은 덜컹거리는 바퀴보다 더 시끄러웠다
왠지 주위 사람들이 다 나를 다 쳐다보는 듯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다른 부서 직원들이 벤치에 쭉 앉아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일부러 발걸음을 늦춘 적도 있었다.
그러다 하버드 대학원을 같이 나온 건축가 동기와 마주친 오늘
나의 자존심은 바닥에 패대기 쳐졌다...
학력, 직업,,
지난 몇 년간 나를 빛나게 해 준 것들은
동시에 나를 나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의식하는 것은
날 더더욱 약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나를 탈피해야만 했다.
공원을 가꾼다는 책임감에 뿌듯한 순간도 많았고
처음 해보는데 생각보다 소질이 있어 잘하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자면... 기계를 고치고 물건을 조립하는데 희열을 느꼈다.
설계와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동을 하다 보면 확신이 서지 않고 불안했다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지금 당장 누가 먹다 버린 치킨 뼈를 치우는 일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빠, 힝.. 삽질하기 힘드네요"
"삽질이라니! 버럭!! 너는 현장의 중요성을 배우고 있는 거야. 공원에서 생노동이 초석이 되어 너의 언터쳐블한 스킬이 될 거야. 그 스킬은 너에게 디자이너로써 멋진 기회를 가져다줄 테니... 삼 년만 참고해 봐"
언터쳐블한 스킬
삼 년
그때는 참 길게 느껴졌는데
(아빠 땡큐)
공원 관리직을 하기로 맘먹은 것은 온전히 나의 호기심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기 위해 매일 나의 에고를 다스리고 또 나 자신을 넘어서야 했다.
그리고 믿어야 했다.
내가 공원에서 일하며 얻는
공공장소에 대한 지식과 지혜는 무지하게 값어치 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이것은 내 인생의 긴 프로젝트의 일부
커리어라는 양탄자를 타고
이 인생의 꿈의 여정을 맛보기 위해 지나가는 한 챕터.
나의 자존심은 참 많이 다쳤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자존감은 나에게 리마인드 시켜주었다
그 어떤 상황,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일을 하고 있어도
당당할 수 있는
진정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난 그 이후로 엘리샤를 몇 번 더 마주쳤다
엘리샤는 나를 보고도 모른척했다
쌩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그때는 몰랐다
몇 년 뒤 엘리샤가 맡은 공원 디자인을
내가 심사하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