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4. 내 마음을 맞춰봐

당신 엄마도 모르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알까!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세 달 넘게 기획안 작업을 했다.


수정을 셀 수 없이 했다.

커피 값이 월세만큼 나갈 정도로.


클라이언트와 통화도 자주 했다.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요구도

말이 되게 만들어서 다 반영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뒤통수 제대로 치는 클라이언트의 말 한마디였다.


"작가님, 그림이 안 보여요."


순간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지금까지의 모든 작업 시간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진 순간이었다.




'그림이 안 보인다'는 게 대체 뭔 말인가?


내 기획안이 추상화도 아니고,

뭔 그림을 이야기하는 건지!


이번 프로젝트는 광고가 아니다.

사내 직원용으로 한번 송출되는 영상인데

*스토리보드까지 만들라는 건가?

(*영상 장면 그려놓은 계획서)


이것도 아니면,

방향이 틀렸다는 건가?

그냥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건가?


아니다,

갑들의 필살기, '내 마음을 맞춰봐' 게임이다!


규칙도 없고, 판정 기준도 없는.

언제나 '을'이 질 수밖에 없는 게임.


당신 엄마도 모르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알까!


"주님, 쟤 죽이고 저도 죽을까요?"




참다 참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왜 안 보이세요? 어떤 부분이 안 보이죠?"


그러자 돌아온 반응

"... 그럼 PD님과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아, 이 뻔한 수를 또 쓰는구나

작가가 감정적으로 나오니까

PD와 얘기하겠다는 거다.


마치 내가 유치한 사람인 양 만드는 클래식한 수법.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를 끊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했나?

프로답지 못했나?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매번 나만 참아야 하지?




프리랜서라는 이름 아래

늘 나를 눌러왔던 생각들이 있다


• 다음 일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참자

• 더럽고 치사해도 클라이언트한테 맞추는 게 내 일이니까. 참자

• 그래도 덕분에 월세는 내고 살잖아. 참자


괜히 서러워지려던 찰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안 보이는지" 묻는 게 잘못인가?

세 달 작업한 결과물에 대한

구체적 피드백을 요구하는 게 무례한가?


생각해 보니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패턴 A: "뭔가 아쉬워요"
→ 뭐가 아쉬운지 묻기 → "음... 설명하기 어렵지만 2% 부족해요"


• 패턴 B: "임팩트가 부족해요"
→ 어떤 임팩트를 원하는지 묻기 → "그냥... 임팩트요. 아시잖아요.“


• 패턴 C: "그림이 안 보여요"
→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 묻기 → "PD님과 얘기할게요"


세 달 동안 나는 클라이언트와

즐거운(?) 게임을 한 거였다.




다음 날, PD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그냥 전체적인 톤을 바꾸고 싶다고 하네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그렇지!

'그림이 안 보인다'는 건 핑계였고,

그냥 마음이 바뀐 거였다.


세 달 동안 나의 영혼을 갈아넣은 기획안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놓고도

눈 하나 감짝하지 않는 그 뻔뻔함이라니!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냐~~~~~


"주님...감당할 만한 시험 외에는 안 주신다고 했는데

이번엔 자신이 없어요…피할 길을 주세요~~~“


피할 길은

기획안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거였다.


빌어먹은 현실이지만

난 프로니까!




솔직히 이런 게임을 할 때마다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에 또 이 게임판에 앉게 될 것이다.


나의 기도가 더 간절해지는 이유다.


"주님, 그땐 좀 더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도록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세요."


힘들었지만, 살아남은 오늘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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