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엄마도 모르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알까!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세 달 넘게 기획안 작업을 했다.
수정을 셀 수 없이 했다.
커피 값이 월세만큼 나갈 정도로.
클라이언트와 통화도 자주 했다.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요구도
말이 되게 만들어서 다 반영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뒤통수 제대로 치는 클라이언트의 말 한마디였다.
"작가님, 그림이 안 보여요."
순간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지금까지의 모든 작업 시간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진 순간이었다.
'그림이 안 보인다'는 게 대체 뭔 말인가?
내 기획안이 추상화도 아니고,
뭔 그림을 이야기하는 건지!
이번 프로젝트는 광고가 아니다.
사내 직원용으로 한번 송출되는 영상인데
*스토리보드까지 만들라는 건가?
(*영상 장면 그려놓은 계획서)
이것도 아니면,
방향이 틀렸다는 건가?
그냥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건가?
아니다,
갑들의 필살기, '내 마음을 맞춰봐' 게임이다!
규칙도 없고, 판정 기준도 없는.
언제나 '을'이 질 수밖에 없는 게임.
당신 엄마도 모르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알까!
"주님, 쟤 죽이고 저도 죽을까요?"
참다 참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왜 안 보이세요? 어떤 부분이 안 보이죠?"
그러자 돌아온 반응
"... 그럼 PD님과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아, 이 뻔한 수를 또 쓰는구나
작가가 감정적으로 나오니까
PD와 얘기하겠다는 거다.
마치 내가 유치한 사람인 양 만드는 클래식한 수법.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를 끊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했나?
프로답지 못했나?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매번 나만 참아야 하지?
프리랜서라는 이름 아래
늘 나를 눌러왔던 생각들이 있다
• 다음 일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참자
• 더럽고 치사해도 클라이언트한테 맞추는 게 내 일이니까. 참자
• 그래도 덕분에 월세는 내고 살잖아. 참자
괜히 서러워지려던 찰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안 보이는지" 묻는 게 잘못인가?
세 달 작업한 결과물에 대한
구체적 피드백을 요구하는 게 무례한가?
생각해 보니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패턴 A: "뭔가 아쉬워요"
→ 뭐가 아쉬운지 묻기 → "음... 설명하기 어렵지만 2% 부족해요"
• 패턴 B: "임팩트가 부족해요"
→ 어떤 임팩트를 원하는지 묻기 → "그냥... 임팩트요. 아시잖아요.“
• 패턴 C: "그림이 안 보여요"
→ 어떤 그림을 원하는지 묻기 → "PD님과 얘기할게요"
세 달 동안 나는 클라이언트와
즐거운(?) 게임을 한 거였다.
다음 날, PD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그냥 전체적인 톤을 바꾸고 싶다고 하네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그렇지!
'그림이 안 보인다'는 건 핑계였고,
그냥 마음이 바뀐 거였다.
세 달 동안 나의 영혼을 갈아넣은 기획안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놓고도
눈 하나 감짝하지 않는 그 뻔뻔함이라니!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냐~~~~~
"주님...감당할 만한 시험 외에는 안 주신다고 했는데
이번엔 자신이 없어요…피할 길을 주세요~~~“
피할 길은
기획안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거였다.
빌어먹은 현실이지만
난 프로니까!
솔직히 이런 게임을 할 때마다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에 또 이 게임판에 앉게 될 것이다.
나의 기도가 더 간절해지는 이유다.
"주님, 그땐 좀 더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도록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세요."
힘들었지만, 살아남은 오늘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