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이 바꾼 ‘대접'의 뜻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지방 촬영을 다녀왔다.
며칠 머물며 여유롭게 촬영하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그래도 바닷바람도 쐬고,
잠시나마 답답한 서울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살짝 설레기도 했다.
어둑할 때 서울에서 출발해,
한낮의 더위 속에서도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장비를 정리하고 있는데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저희 부모님 고기집 하시잖아요.
서울 가는 길에 들러서 식사하고 가시죠.
제가 대접할께요^^"
제작진 얼굴에 스친 당혹감.
솔직히, 진심으로, 너무 가기 싫었다.
다음 날 또 새벽부터 촬영인데
식당에 들렀다 가면,
서울 도착 시간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하지만 이미 여러 번 거절한 터라
더 이상 No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갔다.
고기 맛은 솔직히...그냥 고기 맛이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
클라이언트가 계산서를 내밀며,
"피디님, 얼마 나왔네요^^"라고 말했다.
분명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했는데
정작 계산은 우리가 한 것이다.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부장에게 전화를 걸더니
일 잘하는 직원처럼 보고를 하는데...
"저희 촬영 잘 마쳤고요.
부모님 식당에 제작팀 모시고 와서 대접해 드리고
이제 서울 올라가는 길입니다"
잠깐, 뭐라고...?
우리가 옆에서 다 듣고 있는데도
저렇게 말한다고?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건 실화다.
이번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 두께가 도대체 몇 센치인 걸까?
자기 부모님 식당 철판보다 더 두꺼운 것 같다.
이걸 갑질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인간성의 문제인가?
사전에서는 '대접'을 이렇게 정의한다.
1. 손님을 음식이나 차, 술 따위를 내어 잘 대함.
2. 예의나 정성으로 상대방을 맞이하거나 대함.
그날 우리가 받은 건 뭐였을까?
대접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머릿 속에서 같은 말만 맴돌았다.
"대접의 의미도 모르는 XX"
그동안 부서에서 존재감도 미미하고
성과도 못 내서 후배들에게 밀리던 그가
우리와 일하며 CEO 표창도 두 번이나 받고,
승진까지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이런 대접이라니.
우리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다.
정말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갑질'이란 말도 너무 가볍다.
"주님, 어디까지 이 클라이언트를 견뎌야 하는 걸까요?
3년이면 충분한 거 같은데...언제까지 참아야 할까요?"
돌아보면,
그날은 단순히 이 사건 하나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모든 부당함이
한꺼번에 터졌던 것 같다.
주님께 질문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주님, 참는 게 미덕인가요?
아니면 맞서는 게 옳은 건가요?
언제까지 이런 부당함을 보고, 견뎌야 하는 걸까요?"
아직도 그 클라이언트와 일하는 중이고,
그 답도 여전히 찾는 중이다.
오늘도 그 클라이언트와 회의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짐했다.
"사랑은 못해도 미워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