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빌런 등극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유럽 출장을 마쳤다.
짧다면 짧지만,
내겐 마치 1년 같았던 일주일이었다.
이번 출장이 유독 고되다고 느꼈던 건,
원래라면 자기네 홍보팀이 맡았어야 할 일들까지
우리 제작팀의 몫이 됐기 때문이었다.
보도자료용 촬영은 피디님이,
통역과 번역은 내가 대신했다.
제작비를 더 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클라이언트의 짜증과 급발진에도
큰 소리 한번 안 내고 버틴 걸로 OK!
한국에 도착하자마다
쉴 틈도 없이 일이 몰아졌다.
편집구성안에, 대본에, 번역까지!
그렇게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밤샘까지 강행해야 했지만
클라이언트 얼굴 안 보니까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대본 피드백을 받은 순간,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메일을 열자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터져 나왔다.
당장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지는 싸움이라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미 배웠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잠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는데
그때, 클라이언트한테 전화가 왔다.
핸드폰에 이름이 뜬 순간,
겨우 진정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작가님~~~~"
유난히 밝은 목소리.
파도가 좀 더 거세졌다.
그가 말했다.
"제 메일 보셨죠~
챗GPT한테 물어봤는데
대본을 전반적으로 다 수정해야겠더라고요"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이
단숨에 끓어올랐다.
소방차 100대가 와도
진화하기 어려울 정도의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겨우 겨우 멘탈을 붙잡았다.
Thank, GOD!
그리고,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내 힘이 아니었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수정하면 되고,
AI가 짚어내지 못한 오류도 있다고 설명했다.
소리치지 않았고,
거칠게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은 내 말은
그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을 것이다.
결국 클라이언트는 여러 번 반박하다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작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수정해 주세요" 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어디서 감히 작가를 말발로 이기려 들어?
흥, 칫, 뿡이다!
그렇게 대본 사건은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대본 최종 컨펌이 나자
클라이언트한테 또 전화가 왔다.
"저는 발주처로서 수정 의견을 말씀드린 건데
왜 작가님은 매번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오시는지 모르겠어요.”
매번? 감정적으로?
나의 분노 버튼을 정확히 알고
누르는 것 같은 이 느낌...너무 별로다!
"이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요, 주님~~~~"
옆에 있다면 미친 척하고
입, 아니 그 주둥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분히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수정은 작가에게 당연한 일이고,
그 자체가 불만인 적은 없었다고 못 박았다.
다만, 번역까지 감당하며 최선을 다한 대본이
“챗GPT가 그러더라”는 한 마디로 평가될 때
기분 좋을리 없다고.
게다가 실제로는 일부만 수정하면 되는데
“다 고쳐라'는 식으로 말한 것도
문제였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곧 태세를 바꿨다.
"이번에 작가님 너무 고생하신 거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한 팀이잖아요. 다음에는 일을 나눠서 하시죠"
살면서 들어 본 빈말 중
단연 최고였다.
대본 사건은 그렇게 끝났지만
이 클라이언트의 서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프로젝트 종료 후 회식.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런 걸까...
소에게 감정이입까지 하며 억지로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클라이언트는
유럽 출장을
무슨 아름다운 추억인 양 늘어놓았다.
제작진은 입을 꾹 닫았고,
눈치 없는 그는 혼자 신났다.
그러다 숙소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숙소 진짜 좋았다”라고 했더니,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숙소 중 최악이었어요.
다음에는 돈 좀 더 써서 좋은 데로 잡으세요"
콧구멍이 두 개라 다행이었다.
숨이 막혀 쓰러질 뻔했으니까.
우리 숙소에서 신세 진 주제에
이게 할 소린가!
이 사람 양심은 완벽한 동그라미일 것이다.
각진 곳 하나 없이 매끈해서,
아무리 굴려도 찔리는 거 하나 없는 거 보면 말이다.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며
별별 모양의 갑질을 겪었지만,
이 클라이언트는 그 중에서도 최강이다.
그럼에도
"God makes no mistake."
분명 이 클라이언트를 만나게 하신 것도
뜻이 있으실 것이다.
알고 싶다.
그런데 또, 모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