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치졸한 면죄부의 언어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한 달 동안 붙잡고 있던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 될 즈음이었다.
구성작가로서 내 할 일은 다 끝나서
오랜만에 여유를 좀 누려볼 참이었다.
그동안 밀려 있던 책도 읽고,
정주행해야지 다짐했던 드라마도 보면서
일상의 삶을 만끽하던 중----
'카톡!'
단톡방 알림음이 울렸다.
클라이언트도 있는 방이었다.
"작가님, 저한테 최종 대본 안 보내주셨더라구요"
....이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최종 대본을 안 보내는 작가가 과연 존재할까?
황당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이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낸 메일함' 화면을 캡쳐해
"다시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하고 보냈다.
한 5분쯤 지났을까.
"대본 확인했습니다"라는 답이 왔다.
아, 다행이다.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복귀...
하려고 했는데
다음 메시지가 날아왔다.
"작가님,
다음에는 저한테도 대본을 꼭 공유해 주세요"
그리고 바로 이어서 또 한 줄.
"그리고 대본 보내셨으면
보냈다고 단톡에 꼭 좀 남겨주세요"
어라, 이건 또 무슨 X소리인가!
꼭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속이 후련했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다.
그때 PD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이건 위로도 아니고, 조언도 아니고...
괜히 PD에게도 화가 났다.
전화를 끊고 단톡방에 답을 남겼다.
"단 한번도 과장님 빼고 대본 보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대본 보낼 때마다
확인 요청하는 메시지도 남겼습니다"
사실 그동안 남긴 카톡 메시지를 캡쳐해서
증거자료로 딱! 보낼까 하다가 멈췄다.
스스로도 너무 치사하게 느껴져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 상태라면
오늘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결국 개인톡을 보냈다.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주세요"
그는 전화를 하자마자 물었다.
"작가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그 목소리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이미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혼자 생각해서 오해하기보다, 직접 물어보려고요.”
그리고 단톡에 남긴 황당한 메시지의 의도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 컴퓨터 파일이 어쩌고,
원드라이브를 바꾸고 나서 어쩌고...
순간, MS 세미나 온 줄!
한참을 듣다가 말을 끊었다.
“지금까지 클라이언트에게
대본을 안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건 숨 쉬듯 하는 일이거든요.
보냈으면 확인 요청 메세지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속상하더라구요.”
보통 이쯤되면,
오해라든지,
자기가 생각이 짧았다든지,
마음 상하셨다면 미안하다든지,
정도의 멘트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말했다.
"이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일인가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러는 너는 왜 감정적으로 반응하냐?"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자기가 대본을 못 찾아서
내가 안 보낸 줄 알았을 뿐,
다른 의도는 없으니 오해하지 말란다.
그니까, 바로 그게 문제잖아!!!!
본인이 대본을 못 찾은 걸
왜 작가 탓으로 돌리냐고!
갑질에도 최소한의 논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날 이후,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는
그의 단골 멘트가 됐다.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요청을 하든
이 말을 꼭 덧붙인다.
사람 치졸하게 만드는 재주 하나는 인정한다.
나도 뒷끝이 없진 않지만,
이 사람의 뒷끝은 끝이 안 보인다.
나의 철칙은 이렇다.
일로 만난 갑과는 일만 한다.
감정은 최대한 섞지 않는다.
지금까지 갑과의 식사나 회식조차도
거절하며 지켜온 원칙이었다.
밥 먹고 차 마시면서 은근슬쩍
관계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건
세상 불편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감정적으로 참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도 '을'인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과감하게,
‘갑 필터링’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닌 건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지금 나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감정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용기가 아니라,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는
내 연약한 마음을 따르지 않을 용기 말이다.
P.S 오늘 단톡방에 클라이언트가 메시지를 날렸다.
"작가님, 인터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는 빼주세요.
저희 회사 방침이라서 요청드린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