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슬픈 1등
오랜만에 촬영장에 나갔다.
이번 촬영은 셀럽이 출연해서인지
클라이언트가 특별히 요청했다.
내가 좋아하는 클라이언트의 부탁이라
열일 제치고 달려갔다.
오랜만에 얼굴 보며 인사도 나누고,
근황도 묻고,
다음 프로젝트 이야기도 하면서 즐거웠다.
촬영은 순조로웠고,
출연자도, 클라이언트도 모두
만족하는 눈치였다.
클라이언트는 "자주 얼굴 봬요"하며
밝은 얼굴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
피디님이 저녁을 같이 하자길래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오랜만의 저녁 식사 자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한 카메라 감독님이
오늘 클라이언트와 내가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고.
"클라이언트와 그렇게 친밀하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작가는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다른 기업 촬영 현장에선
피디와 작가를 어찌나 함부로 대하는지
보는 자신이 더 민망할 정도라고.
정말 만고의 진리다.
"어디나 빌런은 있다"
"사이코패스 피하면, 소시오패스 만난다"
그 말을 신호로
각종 갑질 썰들이 쏟아졌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분노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갑질 배틀을 치렀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안에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놈을 이길 자는 없다.
역시 최강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한 갑들처럼
차라리 앞에서 막말을 하면
같이 맞받아치면서
정당방위라고 주장이라도 하지.
이 놈은 티 안 날만큼 계속 잽을 날린다.
아주 나이스한 미소를 장착하고 말이다.
그래서 시원하게
그놈에 대한 썰을 풀었다.
한번 시작하니
방언 터지듯 멈출 수가 없었다.
카메라 감독님이 엄지 척을 하시며,
"You win"ㅋㅋㅋㅋㅋ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걸 어떻게 3년이나 버티고 있냐고
대단하다고 했다.
갑질 배틀이라는 콘텐츠가 있다면
분명 내 회차는 레전드일 것이다.
정말, 웃픈 현실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웬민하면 뒷담화,
안 하려고 노력한다.
할 때는 시원해도
돌아서면 마음이 찝찝하다.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그냥 많이 겪어 봐서 안다.
뒷담화가 도움이 될 때도 있고
잠깐의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웠다.
특히, 오늘처럼 누가 더 갑질을 잘하나를 두고
배틀을 벌이는 건 그 순간은 시원해도
사실은 좀 슬프다.
웃으며 말하지만
그 웃음 안엔
'을'의 처절함이 배어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나 마음이 편치 않다.
또 다짐한다.
앞담화 할 수 없으면
뒷담화도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