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인생에도 이런 일이?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지난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7년을 함께해 온 프로덕션.
내가 쓴 기획안으로 중요한 입찰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발표 전날 밤 11시. 카톡 한 줄.
"작가님, 내일 안 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힘드실까 봐요."
배려라는 포장지로 감싼 배제.
발표에 능숙한 다른 작가님을 데려갔겠지.
본인들은 신의 한 수라 생각했을 거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쯤 지났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회의로
그 팀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날 오전, 언니에게 톡이 왔다.
“너 배제시킨 그 기획안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오늘 그 사람들 만나는데, 너 기분은 괜찮아?”
나는 답했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아무 소식도 들은 바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의도 따위, 곧 드러날 거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하나님 자녀 건드리면
우리 아버지가 가만 안 둬~"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 같은 얘기였다.
그날 오후, 회의실.
그 팀을 만났다.
다른 때 같으면 물었을 거다.
발표는 어땠는지, 우리가 몇 등 했는지.
그런데 그날은
묻고 싶지 않았다.
말도 섞기 싫었다.
그런데 알아서 떠들...
아니 입을 나불거렸다.
“작가님! 저희 1등 했어요!”
“그때 그 작가님 모시고 갔거든요.”
“내년에도 같이 일하시죠!”
나는 축하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아, 그러셨어요.”
그게 전부였다.
여기까지는 그냥 을의 씁쓸한 일상이었다.
드라마로 치면,
을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는 전반부쯤?
하지만 드라마에는
반전이 있어야 하지 않나.
회의가 한창일 때,
문이 열렸다.
클라이언트 팀의 팀장이었다.
평소 회의에 들어온 적 없는 분.
1등 축하하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가기 전, 한마디.
“그때 발표하신 작가님 있잖아요.
다시는 발표시키지 마세요.”
순간, 회의실 공기가 바뀌었다.
“그분이 발표해서 이 팀 떨어질 뻔했어요.
기획안과 실적 덕분에 1등 한 겁니다.”
신의 한 수라며 으스대던 대표님.
얼굴이 굳어갔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굳이 그 말을,
굳이 그날,
굳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오전에 언니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아버지가 가만 안 둬~”
바람 같던 그 기도가
그날 오후에 응답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복수를 꿈꾼 적도 없다.
그냥 조용히 상처받고 있었을 뿐.
그런데 진실이 드러났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리고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지도, 빈정대지도 않았다.
그게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품위였다.
지인이 말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아.”
맞다.
정말 그랬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드라마는 내가 쓴 게 아니었다는 것.
진정한
신의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