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프레젠테이션에서 배제되는 일을 겪고
이틀이 지났다.
다른 프로덕션 피디님께 전화가 왔다.
8년째 같은 기업 일을 함께 해 오면서
매년 사업 수주를 위한 기획안을
피디님 하나, 나 하나 나눠서 작업해 왔다.
그런데 이번엔,
"작가님, 늘 작업하셨던 것처럼
기획안 두 개 작성해 주시면 돼요"라고 말했다.
으잉?
내 기억이 잘못됐나...?
확인해 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게다가
기획안은 원래 하나만
제출해도 되는 구조였다는 걸
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나는 그동안
최종 기획안을 보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두 개를 제출했으려니 믿었으니까.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작가님, 이번엔 두 개 작성 가능하실까요?
성공 확률을 좀 높이고 싶어서요"
이렇게 말하면 될 일이었다.
처음엔 배제를 당하더니
이번엔 거짓말이다.
대체 왜들 이럴까.
함께 한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데...
아니면, 지금까지 늘 이런 식이었는데
나만 몰랐던 걸까.
원치 않은 의심이
조금씩 내 안에서
고개를 든다.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면
내가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내가 한 발 물러서는 게 낫다고.
꼬치꼬치 따지기 보다
그냥 믿어주자고.
나의 신뢰를 너무 쉽게 내준 거,
그게 잘못된 거였을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하게 요구하고
더 따지고
더 싸워야 했던 걸까.
물론, 내가 속이기 쉬운 상대여서
그 오랜 시간 나와 일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력이 없었다면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테니까.
응어리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러니 지금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슬프면 울기로 하자.
하지만 그 감정에
오래 머물진 않을 거다.
자기 연민이
얼마나 큰 시간 낭비인지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배웠으니까.
앞으로도 모든 기만을
다 알아차릴 순 없을 거다.
그렇다고
매번 의심의 눈초리로
사람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하나,
이제는 맘 놓고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방법은?
아직 모른다.
그래서 기도하기로 하자.
부족한 내게 지혜를 달라고.
지금은
그렇게 하자.
아직은 많이 아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