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20. 구성작가의 위치

피라미드 맨 아래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에게 ‘을’이다.

나는 프리랜서 구성 작가로,

피라미드 맨 아래 서 있다.


일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가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에는

나에게 일을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는

제작사가 있다.


그러니 구성작가는

맨 아래 서 있는 구조가 된다.


가끔은,

최약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

2026년 신규 사업 수주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한 제작사의 대표님이

기획안과 구성안,

그리고 전략 작성을 요청하시면서

발표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PPT 준비에 최선을 다했고,

일정도 비우고,

예상 질문까지 준비했다.


발표 하루 전,

밤 11시가 넘은 시각.


대표님이 메시지를 보내셨다.


"작가님, 내일 안 오셔도 됩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다음 날 아침,

뭔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만 배제된 느낌.

용기 내어 이유를 여쭤봤다.


"최근에 프로젝트 끝내느라 고생 많으셔서

힘드실까 봐서요"


좀 더 그럴싸한 핑계를

생각할 순 없었을까?


변명조차 너무 성의가 없다.


나를 진짜 배려했다면

며칠 전에 논의할 수 있었다.


스케줄 문제라면,

조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 전에,

그것도 밤 11시에?


이건 배려가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도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한 제작사가

기획안 작업을 요청했고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수주도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대가도 없었다.


나중에 그 대표가

돈을 들고 중국으로 도망간 후에야

화가 난 직원 PD들의 하소연 속에서

우연히 알게 됐다.


우리는 선택받는 위치다.

(물론, 내가 선택할 때도 있다)


계약서도 없고,

작가료 기준도 명확지 않다.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어도

작가가 까다롭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물어보기 어렵다.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이 제작사와의 인연은

벌써 7년이 넘었다.


기획안 작업을 여러 번 했지만

작업비를 먼저 요청한 적은 없었다.


일이 성사되면

제대로 챙겨주겠다는 말을 믿었다.


프리랜서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일로 깨달았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관계의 온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았다.




사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이 제작사와 인연이 있는

기획 작가님이 있다.


PT에 탁월한 분이다.

그분이 발표에 들어갔겠지.


괜찮다.

제작사의 선택이니까.


문제는,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만약 말해줬다면,

제작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모든 걸 다 준비한 다음에야 알려준 건,

배려가 아니라 무책임이다.




최선을 다한 만큼

상처도 깊다.


괘씸하니까

당장 그들과의 인연을 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음 의뢰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이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고난은

나를 약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나를 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고난이 왔을 때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넉넉한 마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 관점이다.


어차피 드러날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그리고 이 제작사는

나의 종착지가 아니다.


잠시 머무는 정류장일 뿐.


그곳에서 최선을 다한 시간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있을 테니

그거면 충분하다.




다음 주

그 팀을 만난다.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을까.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아직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 필요한 건,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듣는 귀.


그리고 쫄지 말자!!

나는 계속 기록자로 살아갈 테니까.

이전 21화갑질일기 #19. 100분의 1의 작가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