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잠시 쉼표
PD들에게 말했다.
미국 출장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계획한 고백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으며
빌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Second PD의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작가님은
그 XX의 모든 갑질을 겪으시면서도
왜 이 일을 계속하세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좋은 팀워크가
버팀목이 되어줬죠"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이젠 그만하려고요"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프레젠테이션에서 배제된 이야기부터
이 일을 가볍게 대하는
대표님의 태도까지
그간의 일을 차분히 털어놓았다.
그 빌런을 견디게 해 주던 버팀목이
의미를 잃은 순간,
더는 그 빌런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마웠다고.
프리랜서인 나를
팀의 일원으로 대해줘서.
이야기 중간중간,
두어 번쯤 울컥했다.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울었다면,
오래도록 이불킥 했을 테니.
저녁 내내
두 사람은 나를 설득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만두는 결정에
그 빌런도,
대표님의 태도도
분명히 한몫했지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가장 좋았던 건,
후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에 있어서도,
팀과의 관계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미국 출장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해야 할 일들은
매일 쏟아지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
마지막이기 때문일까.
그 빌런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이나
대표님에게
당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보여주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다만, 나중에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이보다 더 열심일 수 없었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두고두고 회자될
최고의 영상을 만들고 싶다.
마지막 뒷모습까지
당당하고 싶다.
그들에게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