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을 건너는 믿음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처음 갑질일기 연재를 시작했을 때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고발이 아니라고.
누군가를 향한 복수도 아니라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쏟아내기에 바빴다.
누군가의 공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 그건 정말 힘들었겠다."
그렇게 분출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분노는
질문이 되어갔다.
갑과 을.
언제부터 이 단어는
권력의 언어가 되었을까.
원래는 계약서에 등장하는
두 당사자였을 뿐인데.
갑이 먼저 서명하고,
을이 나중에 서명하고.
그게 전부였을 텐데.
왜 갑은 위에 서고,
을은 아래에 서게 됐을까.
아름다운 갑을 관계는
정말 불가능한 걸까.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계약의 양 당사자로서
동등하게 협력하는 관계는
그저 이상에 불과한 걸까.
이 질문들은
결국 나를 향했다.
갑질에 시달리고,
감정을 소모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바닥까지 내려가
"정말 지랄 같다"를
수천수만 번 외치면서도
이 일을 나는 왜 놓지 못하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기고,
그 글이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
내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고,
누군가의 표정이 되고,
누군가의 기억이 되는 것.
그게 좋았다.
그래서였다.
갑질 때문에 지치고,
빌런 때문에 상처받아도
언제나 나의 자리는
키보드 앞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한 프로덕션과
이별을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출장을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나 다음으로 오는 작가님이
최강 빌런과 아무 문제 없이
잘 적응하면 어쩌지.
그건 결국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의미가 되는 걸까.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자꾸 힘을 잃는다.
나 스스로
내가 문제였음을
증명하게 될까 봐....
유치한 질문인 걸 알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보았다.
'잘 적응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이 최강 빌런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그의 입맛이
훌륭한 작가의 기준인 걸까.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는 나를
작가로서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사실,
이런 불합리와 부당함 속에서도
떠나는 결정이 이토록 오래 걸린 건
단칼에 자를 수 없는 관계들과
복잡하게 얽힌 상황들 때문이었다.
특히,
인맥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업계에서
다음 일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현재의 관계를 끊는다는 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했다.
"다음 스텝을 보여주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조건부 순종이었다.
성경에는
두 개의 강이 나온다.
홍해와 요단강.
홍해는
갈라진 뒤에야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단강은 달랐다.
물에 발을 먼저 담갔다.
길이 열리기 전에.
믿음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마 요단강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 스텝은 보이지 않는다.
수입은 줄어들 것이고,
불안정한 시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발을 내디뎌야 할 때가 있다.
갈라지지 않은 강 앞에서
그래도
걸어 들어가야 할 때가.
갑질일기는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기록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계속
쓰고, 묻고, 기록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