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24. 프리랜서가 일을 그만둔다는 것

웬만해선 없는 일이다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출장을 가기로 했다.


10월부터 내정되어 있었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그 최강 빌런과 함께 가는 출장이라

올해 2월, 스페인 출장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를 넘는 갑질과 상식 밖의 행동,

하루에도 수십 번 널뛰는 감정까지.


그걸 견뎌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작가였고,

통역이었고,

쇼핑 가이드였고,

연출까지 도맡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모든 역할을

혼자 다 감당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미국 출장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같은 악몽이 반복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프로덕션 대표님이

정말 싹싹 빌다시피

부탁을 하셨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내년에는

그 최강 빌런과 일하지 않게

조치를 취해줄 수 있느냐고.


대표님은

입찰에서 1등만 하면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 약속을 믿고

미국 출장을 결정했고,

입찰 기획안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썼다.


그런데

그 입찰에서

나는 배제됐다.


그 사건으로

상심한 나를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이 팀에게 내가 바랐던 건,

그저 공감이었는데...


대표님은 말했다.

입찰에서 1등을 한 건

축하할 일이지

배제된 것에 대해

서운하다고 말할 일이 아니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게 할 말인가 싶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최강 빌런과 일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지.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다.


기업에서 정한 규칙을 어기고

외부 사람을 데려가

발표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요구를 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데려간 것도 아닌데,

왜 그 책임이

내 몫처럼 돌아오는지...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기업도 이상하다.


외부 사람 투입이

룰을 어긴 일이었다면,

왜 그 프로덕션에게

1등을 줬을까.


갑들의 세계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까?


클라이언트와 프로덕션,

이 갑들끼리

무슨 말이 오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대표님과 통화를 마치고

나는 깨달았다.


이 프로덕션에게서

내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PD 출신 작가인 탓에

연출의 부담까지

자연스럽게 떠안은 날들이 많았다.


현장을 사랑했고,

그 생동감이 좋았기에

괜찮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PD들의 고충을 잘 알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건 업무를 떠넘기는 게 아니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건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표님의 무책임한 태도와

공감 없는 말들은

내 수고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가볍게 여긴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줬다.


클라이언트가 아무리 힘들게 해도

이 팀과 일하는 게 좋아서

그 최강 빌런과의 3년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그만두는 결정이

너무 어려웠는데

대표님의 태도 덕분에(?)

결정이 훨씬 쉬워졌다.


미국 출장은

아마

이 팀과 함께하는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자,

집중하자!

이전 25화갑질일기 #23. 드라마와 현실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