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없는 일이다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출장을 가기로 했다.
10월부터 내정되어 있었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그 최강 빌런과 함께 가는 출장이라
올해 2월, 스페인 출장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를 넘는 갑질과 상식 밖의 행동,
하루에도 수십 번 널뛰는 감정까지.
그걸 견뎌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작가였고,
통역이었고,
쇼핑 가이드였고,
연출까지 도맡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모든 역할을
혼자 다 감당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미국 출장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같은 악몽이 반복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프로덕션 대표님이
정말 싹싹 빌다시피
부탁을 하셨다.
그래서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내년에는
그 최강 빌런과 일하지 않게
조치를 취해줄 수 있느냐고.
대표님은
입찰에서 1등만 하면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 약속을 믿고
미국 출장을 결정했고,
입찰 기획안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썼다.
그런데
그 입찰에서
나는 배제됐다.
그 사건으로
상심한 나를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이 팀에게 내가 바랐던 건,
그저 공감이었는데...
대표님은 말했다.
입찰에서 1등을 한 건
축하할 일이지
배제된 것에 대해
서운하다고 말할 일이 아니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게 할 말인가 싶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최강 빌런과 일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지.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다.
기업에서 정한 규칙을 어기고
외부 사람을 데려가
발표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요구를 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데려간 것도 아닌데,
왜 그 책임이
내 몫처럼 돌아오는지...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기업도 이상하다.
외부 사람 투입이
룰을 어긴 일이었다면,
왜 그 프로덕션에게
1등을 줬을까.
갑들의 세계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까?
클라이언트와 프로덕션,
이 갑들끼리
무슨 말이 오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대표님과 통화를 마치고
나는 깨달았다.
이 프로덕션에게서
내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PD 출신 작가인 탓에
연출의 부담까지
자연스럽게 떠안은 날들이 많았다.
현장을 사랑했고,
그 생동감이 좋았기에
괜찮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PD들의 고충을 잘 알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건 업무를 떠넘기는 게 아니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건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표님의 무책임한 태도와
공감 없는 말들은
내 수고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가볍게 여긴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줬다.
클라이언트가 아무리 힘들게 해도
이 팀과 일하는 게 좋아서
그 최강 빌런과의 3년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그만두는 결정이
너무 어려웠는데
대표님의 태도 덕분에(?)
결정이 훨씬 쉬워졌다.
미국 출장은
아마
이 팀과 함께하는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자,
집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