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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무요 Apr 07. 2022

01. 옷의 역할

의류 생산과 패션 디자인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의 의상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수공예적 요소가 포함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나머지 디자인을 가상 속에서 완성 단계까지 수행하고 말 것이다. 심지어 스크린을 통한 가상 단계에서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고 완전하게 확인해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단계에서 멈춘다는 점이다.


스크린만으로 옷 전체를 볼 수 있는 시대는 결국 내가 생각한 디자인을 언어만 가지고도 보여줄 수 있는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프로그램이 만든 가짜논문이 통과되고, 인공지능이 작성한 소설이 그 나라 전국문학대회 심사를 통과하는 일이 이미 지난 과거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을 경매로 구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언어로 대체 가능한 현 단계의 패션디자인은 곧 인간의 고유한 영역의 지위에서 내려올 것이다. 언어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언어에 의한 종속을 의미한다.


종속되는 순간 그 즉시 패션 디자인은 자연어뿐만 아니라 인공어로도 소통 가능한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점은 프로그래밍이든 인간의 대화이든 간에 옷은 이야깃거리 정도로 그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지금 단계에서 사실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비약일 수 있지만, 적어도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야깃거리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해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옷의 다음과 같은 특징에서 기인한다. 옷은 타인을 거쳐 존재가 확인되고 관계가 성립된다.


옷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신체에서 독립할 수 없다. 옷이 사람의 몸을 떠나 단독으로 존재하면 그 순간부터 옷은 제 역할을 잃는다. 더욱이 옷의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서 출발하지만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경우가 아닌 이상 디자이너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정착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옷은 옷을 만든 나와 다른 외계의 성격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 내지 만든 옷은 디자이너의 옷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착용자의 옷이다. 옷은 결국 디자이너-착용자라는 두 대상을 연결짓는다. 동시에 옷 스스로도 자신이 덮고, 자신이 둘러싸여진 몸과 얽힌 관계를 형성, 서로 다른 대상 간의 대응을 도출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매체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옷이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역할을 도맡을 수 있으려면 역시 앞서 살펴본 옷의 특성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옷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물론 지금은 관계 형성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의 첫 인상을 옷으로 규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 자체도 표현수단(현대 패션 산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인) 정도로 그쳐서는 안된다. 즉 어떻게 신체를 덮는가(technique), 옷으로 무엇을 표현하는가(fashion design)를 넘어 다음 문제 - 옷이 입는 대상이 아니라 만남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로 나아가야한다.


막연하게 한 가지 던져보자면, 착용자의 신체에서 옷이 덮고 있지 않고 드러난 신체를 어떻게 옷으로 불러올 지에 대한 논의가 앞서 제시한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 방법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위 문제를 회화에서의 여백, 조각에서의 공간과의 조응 정도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옷에서 조응의 문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옷이 단독으로 돋보이지 않고 착용자가 옷과 함께 생기를 가질 수 있는 옷이여야만 한다.  따라서 옷은 단순한 수단, 기능에 그치지 않고 몸과 상응하여 사람의 행동, 몸짓을 도출해낼만큼 착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박무요

朴無要


instagram@parkmu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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