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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무요 Apr 08. 2022

02. 산업 너머의 패션

옷은 공산품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계절에 따라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고 이를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하며 풍부한 아카이브를 쌓아오는지, 나아가 브랜드 고유의 헤리티지, 레거시라 일컫는 역사를 정립하는지가 패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브랜드를 가려내는 하나의 척도였다. 현대 패션은 여기에 덧붙여 기발한(= 서로 접점이 없어 보이던), 그리고 풍부한 교류와 함께 협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가 역시도 중요한 기준이 된 모양새다.


그만큼 지금 패션은 브랜드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상호 간의 협업이 활발하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한 현상이 옷이라는 개별 단위 하나하나에 해체주의가 접목된 이후 패션 산업 전반에 작용하는, 옷 이상의 단위에서 일어나는 탈구축적 흐름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미술계와 마찬가지로 그 다음을 외치며, 특히 패션업계에서는 해체주의를 주창하며 입지를 다져온 브랜드들이 주류 시장에 편입되면서 결국 수많은 스타일 중 하나로 굳어버린 한계를 맞이했듯, - 한계라고 언급한 이유는 역시 그들 스스로 옷을 다 해체하고 나서 멈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 앞서 언급한 협업으로 통칭되는 '흐름' 역시도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그 흐름이 머지 않아 막혀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지어 헤론 프레스톤은 22년 4월에 무분별한 협업에 대해 비판하며 "협업 하지 않음"을 주제로 삼은 옷들을 선보였다.


https://www.instagram.com/p/Cb8b8wgL9D7/?utm_source=ig_web_copy_link


그러면 지금의 옷, 지금의 패션은 무엇일까. 옷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발 조차 들이기 힘들고, 설령 들어온다고 한들 곧 떠나버릴 가능성이 많은 패션업계의 특성을 고려하면 다소 과한 비약이겠지만,(나도 비약이길 간절히 바란다.) 훗날 지금 시대의 옷은 결국 유니클로의 옷으로 기억될 것이다. 매 시즌 치열하게 컬렉션을 통해 늘 한계를 시험하는 브랜드보다는 유니클로의 옷, 그리고 그들의 생산방식이 더 의미있게 기록될 것이라는 뜻이다. 유니클로가 작금의 시대 양식, 곧 스타일이다.


순수한 개인적 망상을 더하자면 디자이너의 시즌별 컬렉션과 브랜드의 아카이브는 곧 유니클로로 대표되는 대량 생산의 대표 주자들과의 협업을 위한 포트폴리오 정도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결국 지금의 패션은 디자이너의 역할과 브랜드의 역할을 모두 잃을 처지에 있다. 디자인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할테지만, 디자이너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개성있는 브랜드들은 언제나 요구될테지만, 실제 제작을 누가 도맡을 것이냐는 다른 문제다. 언제까지고 디자이너와 소위 말하는 하이패션의 전유물로만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엘리트주의의 폐해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그래왔듯, 새로운 탈구축을 찾아 형성해야한다. 가령 대량 생산된 옷들과 확실히 구별 지을 수 있는, 소량 생산을 넘어선 일대일 생산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성복이 자리잡기 이전의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바는 아니다. 포스트-비스포크 정도에서 머무를지도 모른다. 역시 앞서 말하는 바는 남들보다 앞서 시대를 내다보고 빠르게 움직이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시대에 등을 돌릴지라도 자신들의 작업을 지켜야하는 이들을 위한 생존 전략이다.


과거를 답습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존 비스포크 시스템보다는 멀리 나아가야할 것이다. 단순히 고객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하고, 소비자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소비자 스스로의 취향에 맞추어 드리는 정도의 영역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물론 이쪽 세계에도 확실한 수요와 그들만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과거의 방식은 미래를 지배할 수 없다. 이러한 영역은 아직까지는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남아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의 답습을 포스트 비스포크라고 제안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 그대로 'post'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포스트 비스포크란 결국 무형의 영역을 건드려야 한다고 믿는다. 단순한 일대일 생산은 이미 한참 지난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옷 사이에 '만남'이라는 단어가 들어올 여지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즉 소비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 방식이 전개된다면 자연스럽게 현재의 럭셔리 하우스들의 방식은 말 그대로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즉 디자이너의 이름은 현재 브랜드의 상표, 태그처럼 구매로 이어지는 주요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방식은 결코 변화를 불러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시도 과거의 방식이다. 이름은 캔버스 뒤나 구석에 자리잡은 서명처럼 소비자가 구매를 고민하고 잇는 그 옷 자체를 증명할 수 있는 증표로만 작동해야한다. 이것만 하더라도 증표를 한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는 거대한 가품 시장과 옷의 진위 판단 방식, 미술작품과는 구별되는 옷의 소비재적 성격, 정작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이름 없이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가 산더미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디자이너 - 옷이 작가 - 작업물 정도의 관계까지 나아가고자 시도하는 것이 먼저다.


인공적이기보다 자연적인 농산물이 처음부터 상품으로 내다 팔 목적으로 제조된 공산품과 어찌 등가의 상품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천규석, 이 땅덩이와 밥상, 창작과 비평사, 1993.


박무요

朴無要


instagram@parkmu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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