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미야케 이세이(1938 - 2022).
*2022년 8월 10일 작성.
https://www.nytimes.com/2022/08/09/fashion/issey-miyake-dead.html?smid=url-share
단 한순간도 만나본 적 없는 이에 대한 애도는 그 상황 자체로 무기력하고, 절망적입니다. 개인적 관계가 전무하고, 심지어 그의 실천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가시적이므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이에 대해 어떻게 개인적 경의를 표할 수 있을지 조차 의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수 있고 그를 기릴 수 있어 동시에 희망적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비록 닿지 못할 일방적 송신에 불과하지만, 시도해볼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 지금의 여건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도 동시에 듭니다. 다만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당당히 물러날 수 있는 자를 어떻게 추모할 수 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옷을 통해 희망을 바라보고자 평생을 헌신한 자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좌절해야 하는지 역시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그가 해오던 일을 물려받는 것 이외에 무언가 기대할 수 없다 생각하니 여러모로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날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왜 모든 패션 디자이너들의 패션 디자이너일까요. 답을 하기에 앞서, 시대를 돌이켜볼 때 옷은 중요한 단서가 되어 왔습니다. 옷을 통해 인간은 과거의 시대상을 그려낼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시간을 담고 순간적인 움직임과 조응하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통해 현재의 사람들은 과거와 구분되는 새로운 현상을 지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세대가 자신의 세계를 쇄신하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대가 기억할 개혁은 제한적이고, 이 개혁이야말로 시대를 명징히 구분하는 하나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일생 자체는 인간의 역사, 어쩌면 복식사 안에서도 찰나의 순간일 테지만, 그 찰나의 순간 동안 그가 헌신해 쌓아 온 작업들은 기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이고, 패션 너머의 패션을 개척한 사람입니다. 진실로 그는 패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패션의 풍경 자체를 확장하고, 어쩌면 바꿔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견으로 그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동시대로 불러오고자 도전했고, 비로소 진정한 패션 디자인을 확립한 사람이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분명히 선구자이며 선지자로 일컬어져 왔지만 사실 그만이 유일하게 현재의 패션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I want to represent the action of thinking. We are working towards the concept of […] no fashion.”
진정한 패션 디자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누구도 적확한 답변을 할 수는 없겠지만, 이세이 미야케는 유행에서 분리된 패션을 탐구하며 제언했습니다. 패션을 위한 패션, 유행을 위한 옷에서 벗어나 그는 언제나 사람을 위한 옷을 추구해왔습니다. 즉 그는 사회의 요구에 옷으로 대답한 사람입니다.
패션을 위한 패션에서 벗어나는 순간 패션 디자인은 기능, 장식, 균형, 왜곡과 같은 고전적인 법칙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옷의 목적이 유행의 추종에서 사람으로 이동하는 순간 브랜드와 옷은 정해진 주기에 맞추어 맹목적인 발표와 생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수명과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세이 미야케는 자신의 제언을 실천하고자 전통적인 패션 디자인의 미학, 전통적인 패션 시스템의 문법을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답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방법을 관철한 이세이 미야케를 떠올리면 역시 '패션 너머의 무언가'를 실천해 온 예술가, 연구자 그리고 철학자가 그려집니다. 나아가 이 업계의 광기 - 맹목적 추종, 공허에 대한 욕망, 순간의 박제, 반죽을 해버린 이미지들 - 에서 벗어나 산업의 대안을 제안한 입지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위의 글은 모두 저의 의견에 불과할 뿐, 그와 그의 작업을 설명하기에 적합한지는 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단지 옷과 천을 접고, 구부리거나 펴며, 어쩌면 가지고 놀며 이것들이 몸 위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무엇이 가능한지 확인해왔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역시 만나본 적 없는 이에 대한 추모에서 오는 무기력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써놓고 보니 개인적 능력 밖의 일로 여겨져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의연히, 어쩌면 염치없이, 써 내려가는 이유는 그야말로 착각에 불과한 이 개인적인 생각들이 점차 또렷하고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패션과 옷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견, 의문, 개인적 임무와 밝히고자 하는 소명이 모두 그의 뒤를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마저도 과연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동시에 들기에 주제넘은 일일지라도 할 수 있는 한 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는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위대한 디자이너의 죽음은 분명 저에게 일상의 고통을 가져다주거나 사적인 영역의 분위기를 침잠시킬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상 속 상실감과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 일과 삶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의 영향을 공공연하게 받아오고 그를 애도하고 있을 수많은 디자이너, 예비 디자이너 분들에게도 어느 정도 통용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와 같은 인간도 저의 방식으로 그를 기릴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는 이미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각자의 관점으로 그를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할 테지만, 어찌 되었건 그는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저라는 개인은 그의 연장선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공동체는 그가 매 순간 마주했던 도전들, 제가 실감하고 있는 이 좌절감, 그리고 패션이라는 공동체 자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의 연장선이 되고자 헌신할 수 있고, 지금껏 이를 소명해 온 역사를 환기하게 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그를 통해 한계를 마주하고, 이 공동체와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인 약속을 실감합니다. 그러므로 이세이 미야케를 상실한 오늘은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비극적인 날이지만, 저는 개인적인 감사를 마지막에 함께 기록하고 싶습니다.
When I make something, it's only half finished. When people use it—for years and years—then it is fin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