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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무요 May 08. 2022

06. 수행의 마지막은 감상이 아닐까.

작업은 작업의 수행자가 스스로 종결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창작은 더 이상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는 굳이 글로 적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취미 중 하나로 시도해볼 수 있을 만큼 문턱도 낮아졌고, 예술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굳이 기법을 익히지 않아도 본인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시장에서의 가치는 전혀 다른 문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 생각, 감각을 중심으로 본인만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기술과 자본 덕분에 누구나 자신의 작업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공개할 수 있다. 관람자가 없어도 발표가 가능한 시대다. 나 역시도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고 게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늘어난 창작자들과 줄어든 제약들만큼 실제로 풍요로워진 문화를 향유하고 있을까.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품들처럼 발표되고 게재되는 작품들을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사회는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풍요 속의 빈곤은 날 선 사람들의 공허한 외침에 불과한가?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분명 민주적으로 옳고, 다양성의 차원에서 유의미한 성과다. 아마추어도 자신의 능력을 가감 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제공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지우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아마추어의 위치에서 전문가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내일이라도 전문가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사회와 전문가들의 능력과 업적을 아마추어의 그것과 동일하게 치부하는 사회는 분명 다르다.


더욱이 단순한 흥얼거림, 획, 끄적임이 그보다도 단순한 그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수의 취향으로 인정받는 사회는 옳은가. 그것을 우리는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까. 그곳에 감동이 남아 있을까. 이것이 미래라면 세상에서 창작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창작의 정의를 바꾸던지. 본인이 시대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정의 역시도 시대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기에 새로운 언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창작에서 기술의 영역은 기계로 인간의 숙련도를 대체 가능하게 되면서 누구나 납득할만한 절대적인 평가 기준 따위는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진짜’ 예술인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면서 그 기준을 정립하는 집단이 와해되기라도 했다면, 쉬이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정말 유의미한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 터,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테지만, 여전히 그들은 새로운 기준과 방식을 가지고 두 작품 중 무엇에 가치를 부여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정작 창작자들은 최소한의 기준이라던지, 비교 대상이라던지 하는 참조할 대상이 사라지면서 자칫 표현의 자유의 그늘 아래 자기 안에서 완결해버리기 쉽게 되었다. 기준도 없이 시시각각 움직이는 세계 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뿌리를 내렸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된 듯하다. 아쉽게도 GPS가 그 위치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20세기에 위에서 언급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당시의 첨단은 전승되어온 기법들을 부수고 해체하는 것이었다. 표현 방식 중 하나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미래이자 해결이던 시대가 있었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파괴하는 것이 정답이었고, 부정과 해체는 창조의 또 다른 단어였다. 물론 새롭게 표현 가능한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고, 중요한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지금 다시 바라보면 다소 낭만적이고 나아가 낙천적인 발상이 아니었나 싶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대를 불문하고 그 시대에 통용되던 문법이 있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무시도, 조소도 공존했지만, 그럼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고유의 언어와 정립된 문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해체와 신선함이 문법이 되는 순간 이 문법은 스스로도 해체해야 하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작금에는 과거에 존재하던 선명한 언어가 보이지 않는다.


관중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일단 창작과 발표는 할 수 있는 환경 탓일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만 집중해도 딱히 상관이 없는, 아무래도 좋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에 집중하는지에 상관없이, 몰두하여 작업하는 것은 그저 수행자의 의무이자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최소한 고유한 언어를 찾아 시대의 문법을 정립한, 그 시대를 지금까지도 빛내고 있는 작가들에게 작업은 그저 일상의 일부에 불과했을 것이다. 취미라던지, 치유라던지, 목적도 개인적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수행의 목적이 개인적인 만족에 있지 않다면 결국 작품의 완성은 삶의 일부를 사회와 연결하는 것이 아닐까. 시대가 달라졌다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사회와의 연결은 중요하고, 사회 속에서의 정립은 필수적이라고 아직까지는 믿고 싶은 마음이다. 모든 일이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당연히 창작은 사회에서 떨어진 채 단독으로 성립할 수 없다.


디자인도 사회에서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디자인은 더더욱 사용자를 고려해야 하고, 패션 디자인의 경우 '착용자'로 문제는 더 복잡하다. 매번 말하는 듯 하지만 옷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디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네킹, 사람에 상관없이 '이상적인 몸'을 가져다 놓고 어디를 가리고 어디를 드러낼지 고민한다던지 천을 어떻게 새로운 모양으로 조각내어 연결할지와 같은 고민들이 착용자들에게 불편하고, 착용자들과 어우러지기 힘들다면 다 무슨 소용일까. 디자이너의 명성과 브랜드의 네임 벨류도 중요하고, 쉽게 쌓아 올릴 수 없지만 결국 문제는 옷이다. 디자이너들의 치열한 작업의 결과물은 이름이 아니라 옷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이름보다는 옷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의미로 디자인을 사회와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박무요

朴無要


instagram@parkmu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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