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서 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 제목에서 가깝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물리적인 거리를 뜻한다. 즉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거리는 사람이 옷에 가지는 친밀감, 애착 등 심리적 거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옷과 피부 사이의 거리를 뜻하지도 않는다. 재료 조달과 생산 방식에 있어서 가까움을 뜻한다. 이번 글에서도 여지없이 구시대적인 이야기를 다룰 듯하다.
하기야 압도적인 기술로 거리와 시간이 부여하는 한계를 무시한 채 위치에 상관없이 그저 가장 경제적인 재료를 조달해오는 것으로도 모자라 경제성을 위해 수요 그 이상을 생산하고 있는 사회에서 이런 주제는 통할 이야기가 아니다. 패션 "산업" 역시도 조달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옷의 재료부터 옷의 생산자까지, 이 경제성은 언제나 대전제다. 패션에서 눈을 돌린다고한들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역이 있을까. 아무래도 사람들은 자본을 제외하면 집중할 거리가 없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집중할 거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이 문제인지, 사람들이 하나밖에 집중을 못하는 건지부터 밝혀내야겠다. 둘 중 하나는 패션을 떠나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혹은 둘 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역시 우리가 경제성 아래 하나 되어 질주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브랜드는 산업으로 편입되었다. 저마다의 기준이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자기 나름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지 못하면 브랜드는 유지되기 어렵다. 유명 하우스는 한 손에 꼽을 대기업들 아래 재편되었다. 마치 유명 작가들과 거대 갤러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다가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패션 - 산업과 예술의 경계 그 어딘가 - 에서 삐끗하는 순간 하우스 브랜드의 옷들은 죄다 경매장으로 나올 수도 있겠다. 어쩌면 선물(futures)이 도입될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실히 패션 산업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다르다 보니 상품의 발표와 실제 제작 시기 사이에 괴리가 있기도 하고 심지어 작가들처럼 개인 단위가 아니다 보니 안정적으로 이 시차를 유지해오고 있다.
하지만 브랜드의 유지와 발전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만들어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나저러나 결국은 제조업이다 보니(게다가 생산 공정에 자동화가 도입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룰 필요가 있다.) 단가를 낮추려면 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역시 낭비는 낭비다. 그리고 지나치게 이동하며 만들고 있기도 하다. 당연히 이 역시도 경제성 아래에서 합리적인 결정이겠지만, 품질이나 희소성이 아니라 온전히 가격의 문제로 외국에서 천이 건너오고 다시 또 다른 나라로 생산하러 건너가고 검수는 우리나라에서 하고 발표는 다시 외국에서 하는 양상을 보고 있으면 기술이 지나치게 발전해버렸나 싶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사람이 직접 미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을 보면 이해가 쉬이 가지 않는다.
지금껏 경제성을 최고의 가치로 우선해왔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그 끝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현실만 봐도 예측 가능하다. 물론 "최고"는 이데아처럼 닿지 못할 영역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장 근접할 수 있다면 무엇일까. 최상의 재료는 그저 저렴한 값에 좋은 품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확인했다. 정말 최종 소비자에게 가성비를 높여줄 수 있다면 만사가 형통일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경제성은 마스터키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너지거나 썩지 않아 세월을 거스르며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일까. 아니면 아무도 사용해본 적 없는 독특하고 참신한 재료일까. 이 두 요소도 우리들이 추구하던 가치였음은 분명하지만, 눈을 돌려 가까이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어떠한가. 과거에는 가까이 있는 재료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되리어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기에 다시 한번 돌아볼 만하다. 나와 가까운 재료는 사용자와 같은 장소를 공유하며 동일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햇빛을 받으며 자라온 식물을 가지고 직물을 짜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이마저도 머지않아 기후가 뒤섞이고 온통 엉망이 된 세상에서 모두가 같은 날씨와 기후를 공유하고 있다면 무의미하다. 그 쯤 가면 이런 이야기도 다 과거에 떠들던 낭만적인 이야기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화학 섬유는 같은 장소 같은 햇빛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적어도 자기네들이 배출한 폐플라스틱을 다시 모아서 섬유를 만들어낸다면 자신의 지역에 대한 책임을 일부라도 질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패션 산업에서 디자인 단계 도중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역시 그렇지 않다. 디자인을 결정하는 요소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소재, 즉 옷의 재료를 결정함에 있어서 현직 디자이너부터 전공생에 이르기까지, 이 원단은 얼마나 멀리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소재도 결국 아직까지 근대적인 자기표현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직까지 디자인에서 소재는 주변과 절단된 채 디자이너의 디자인과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말 그대로 재료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다양성을 확보해나가는 이 산업은 정작 자신들 주변과 교류 없이 어디선가 튀어나온 오브제를 만드는 정도에서 벗어난 작업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
더욱이 이 업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찾아오려면 제법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디자이너 내지 디렉터라는 절대적 지위를 확보했거나 이를 원하는 사람들 중에서 전통적 의미로 좋은 소재 혹은 독특한 조형성 등에 대한 집착을 버릴 전문가들과 학생이 있어야 한다. 소재의 경제성과 조형의 특이성을 제외한다면 다음 논의는 "거리는 얼마인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거리는 나와 같은 커뮤니티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었는지,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내 지역의 재료와 기법이 사용되었는지와 직결되는 요소이다. 여기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직업이 디자이너가 아니거나 패션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옷을 만들어 입는다던지, 디자인에 참여한다던지 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
다만 업계의 생존 방식 그 자체인 경제성과 독창성을 잠시라도 내려놓기란 산업에서도 교육에서도 결코 가벼운 사항이 아니다. 역시 폭탄이 터지기 위해서는 기폭제가 필요하다. 누가 기꺼이 기폭제가 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이제 표현은 근대적인 자기실현 같은 주변과 절단된 오브제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이우환, 2002)
박무요
朴無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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