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를 위한 옷에서 착용자를 위한 옷을 향해.
다소 시시한 답변부터 꺼내자면, 천은 당연히 인간을 구해왔다. 단편적으로 사람의 상처를 덮기도, 몸을 데우거나 식혀줄 때도 천이 필요하다. 다친 사람을 옮길 때도 천이 필요하다. 심지어 사람은 매일 천 위에서 잠을 청하고 휴식을 가진다. 사람이 힘든 순간에는 늘 천을 필요로 해왔다. 기술의 발전으로 방화복처럼 천으로 보호하기 어려울 것 같은 위협으로부터도 천은 인간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요즘 시대를 바라보고 있자면 개개인의 패션 또한 험난한 사회에서 버티기 위한 하나의 보호 방법이 아닐까 싶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옷을 통해 자신의 지위나 역할을 드러내어 사회의 구성원임을 밝히고, 사회 속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지금의 천은 물리적 보호뿐만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보호 또한 제공해준다.(후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면서 패션 산업은 괄목할 성장을 이루었다.)
다시 말하자면, 작금의 패션 디자인은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 사람을 구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다. 다만 동시에 치명적이고 그럼에도 불가피했던 부작용을 야기해왔다. 그 부작용은 착용자가 아닌 사람, 타자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패션 디자인이 발전해왔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은 권리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도 당연하고, 조직 내 복장 규정은 점점 완화 또는 소멸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힘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매일 오늘 무엇을 입을지 결정하는 것은 본인이지만 그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 따위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운가 질문해본다면 앞서 언급한 주장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조차도 당연하지 않은 사회가 분명 남아 있다.(22년 4월 23일 수정)
이쯤 되면 패션 디자인은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에서 발전된 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패션 디자인을 다른 디자인 영역과 구분 짓는 가장 명확한 지점이 필연적으로 몸의 구조와 비율을 고려해야만 하고 착용자가 없는 패션 디자인은 그 존재 의의 자체를 상실한다는 점이지만, 정작 디자인의 최종 사용 주체인 착용자보다 옷을 바라보기만 할 관찰자 중심으로 디자인이 발전해왔다는 점은 다소 모순적이다. 사람의 몸은 패션 디자인에게 구해야만 하는 의무의 대상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업계 전체가 몸보다는 눈만 쫓은 결과 패션은 최근까지도 몸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나아가 디자인에서도 외관에 치중한 채 정작 사람의 피부와 맞닿는 내부는 디자인을 시도해볼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하다.
물론 디자인을 몸이라는 구조와 비율에 맞추어야만 한다는 점은 제약이기도 하다. 신체의 규모와 비율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만큼, 똑같이 사람의 움직임이 고려되는 건축과 실내 디자인의 영역보다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패션 디자인의 다음이 무엇인지 답하기 위해서라면 한계를 돌파할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건축에 빗대어 옷의 한계를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규모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옷은 건축처럼 '인테리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옷에 있어서 인테리어라고 함은 시접(건축의 기둥 정도에 비유하고 싶다.)을 어떻게 최대한 깔끔하게 마감할지 혹은 어떻게 안감으로 지저분한 시접을 덮어 사람들의 눈을 피할 것인가 정도에서 멈춰있다. 이 지점이 옷에서의 내부 디자인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세이 미야케는 20세기에 이미 바라만 보는 옷에서 벗어나 착용자가 디자인의 최종 단계에 참여할 수 있는 APOC 시스템을 고안했고, 기술을 통해 천과 천 사이의 시접을 제거하며 옷의 내부에 대한 혁신을 불러오는 데 성공했으나 정작 패션산업은 이러한 시스템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확실히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간다는 것이고 미지의 영역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한다. 확장된 패션 디자인을 우리가 마주하게 된다면 그곳에 우리가 알던 패션 디자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양산된 문제들로 증명된 현재 패션 디자인에서 안주하는 게 맞을까 묻는다면 그 자체가 리스크가 아닌가 싶다. 역시 우리는 옷을 대하던 방식을 달리해야만 길을 찾을 수 있겠다. 앞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나 던져보자면 우리가 옷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어 옷을 또 다른 방으로 간주해보면 어떨까. 즉 건축처럼 신체에서 보다 자유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정도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옷을 입는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옷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생각한다. 패션 디자인은 탈부착이 용이하고 24시간 이동 가능한 방을 설계하는 영역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체에 지나칠 정도로 딱 맞는, 나아가 신체를 왜곡시키려고까지 하던 지난 과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옷과 신체 사이의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고, 공간 디자인처럼 옷에서도 외, 내형을 모두 디자인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이미 동양의 전통적인 복식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체에 들어맞게 설계해 몸의 선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방향으로 패턴을 개발해온 서양의 복식과 달리 동양은 소재 자체에 집중하고 신체와 의복 사이의 공간, 달리 말하자면 옷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여백에 몰두해왔다. 이해를 돕기 위해 미술사에서도 발견되는 유사한 경향으로 설명하자면, 서양에서는 선을 가지고(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이는 패션 디자인에서의 천과 같다.) 무엇을 그릴까에 집중해왔고, 동양은 선 그 자체와 선 이외의 여백에 집중해왔다. 이제는 패션 디자인도 천으로 무엇을 만들지, 어떤 형태를 구현할지 정도에서 머무르지 말고 소재 자체와 소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는 방향은 어떠한지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그 공간을 통해 천은 다시 한번 인간을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무요
朴無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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