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나비 Aug 20. 2024

어떤 와인은, 기억을 마십니다.

동그란 와인잔에 와인을 채우고

가느다란 손잡이를 잡아 빙글빙글 돌리면

자줏빛 기억이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살랑 불어오던 바람

그 바람에 춤을 추던 초록

그 초록들 사이로 듬성하게 내리쬐던 햇살


그 바람이 느껴지고

그 초록이 들려오고

그 햇살이 보입니다

 

투명한 우산의 곡면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

사방을 둘러싼 노란 전구 불빛

아주 오래된 노래


그 빗방울이 느껴지고

그 불빛들이 보이고

그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것들 속에 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색깔

그 사람의 냄새

그 사람의 소리


그것들 속에 그 사람이 있습니다.



좋았던, 힘들었던, 그저 그랬던 하루가

절반쯤 지나가고


동그란 와인잔에 와인을 채우고

가느다란 손잡이를 잡아 빙글빙글 돌리면

자줏빛 기억이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미풍에 흔들리고

초록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슬며시 눈을 감으면

사라락 초록들의 춤추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흘러내린 빗방울이 종아리로 튀어 오릅니다

사방 노란 전구불빛들로 눈앞이 환해집니다

오래된 노래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동그란 와인잔에 와인을 채우고

가느다란 손잡이를 잡아 빙글빙글 돌리면

자줏빛 기억이 슬금슬금 올라옵니다

자줏빛 기억을 입안에 머금고 있으면

그 속에 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와인은,

기억을 마십니다.




*이미지출처: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떠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