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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심심하지 않은 출근길

by 박나비

오랜만에 이어폰을 놓고 나와 뻐쓰를 탄 관계로 한 편 끄적여 보기로 합니다.

오늘 아주 중요하게 챙겨야 할 물건이 있었습니다. 부피가 작지 않아 평소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는 넣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제법 큰 가방을 꺼내와 그 물건을 넣었습니다. 그리곤 평소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 이어폰이 있으니 그것도 큰가방에 챙겨 넣을 생각으로 작은 가방을 가져왔습니다. 손을 넣어보니 충전 케이블이 잡힙니다.


‘아, 그래 이것도 필요하지.’ 핸드폰 배터리 충전을 잘하지 않는 저에게 충전 케이블이나 보조배터리 하나는 필수니까요. 흐뭇하게 충전 케이블을 큰 가방으로 옮기고 저는 서둘러 큰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왔습니다.

나오고 깨달았죠. 어머, 내 핸드폰. 그렇게 집으로 다시 올라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핸드폰을 잽싸게 집어 들고는(신발 벗기 귀찮아서 양발의 외곽 사이드면으로만 서서 뒤뚱뒤뚱 집안으로 들어간 건 설명 안 드려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국룰이잖아요.) 다시 나와 뻐쓰를 탔습니다.


네, 저는 밤새 충전기에 꽂아두어 핸드폰 배터리 100%에 충전 케이블까지 있으며. 심지어! 제가 타는 빨간 광역버스에는 좌석마다 USB 충전 포트도 있지만!

이어폰은 없는 그런 희한한 사람이 되어 앉아있지 뭡니까.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덕분에 뒤쪽 아저씨 코 고는 소리도 듣고요

기사아저씨가 욕 비스무레하게 궁시렁 거리는 소리도 듣고요

앞에 할아버지가 삼십 초에 한 번씩 큰기침을 하시고 사십오 초에 한 번씩 목을 가다듬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중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인지.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어폰이 없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만에 버스 삐걱거리는 소리도 듣게 되고, 유리창이 진동에 흔들려 띠이이이이용 하는 소리도 듣게 되고, 무엇보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하기엔 어제저녁 퇴근길에도 뻐쓰 안에서 한 편을 써서 올렸지만서도 퇴근길과 출근길은 그 무게감부터가 어마어마하게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그 문장이 수려하여 보는 이마다 감탄해 마지않았고 그 흐름이 감동적이라 한 줄마다 눈물을 훔치매 손수건이 마를 새가 없더라’ 급의 글은 아니자만 어디 그런 글들만 글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은 제 글을 읽으면 읽으실수록 더욱 재미지실겁니다. 뾰로롱.


외곽 진입구간에서 굼벵이처럼 기어가던 뻐쓰가 초입을 지나니 이제 뻥 뚫린 순환도로를 쌩쌩 달려갑니다. 이것 참 오십칠 분 교통정보도 아닌데 별소리를 다 하게 됩니다. 이러다 지금 옆에 지나가는 흰색 suv차량 운전자가 창문을 스윽 내리더니 담배꽁초를 버린 것까지 얘기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심한 말. 더 심한 말. 좀 더 심한 말. 여러분들의 순수함을 지켜드리고자 욕은 블라인드처리하였습니다. suv운전자분 유병장수하시길 바랍니다.


시작이 매우 즉흥적이라 끝맺음은 조금 계획적으로 하고 싶은데 어떤 말로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소지품 잘 챙기시고요, 저처럼 집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왔음에도 무언가를 빠뜨리는 그런 불행한 일은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랍니까. 부끄러워 어디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어 지네요 정말.


요즘 날이 좀 풀렸는데도 아침 출근길은 제법 쌀쌀합니다. 감기 조심들 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바랄게요. 여러분 사.. 사..


.. 사는 동안 행복하세요. 저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내린답니다. 이어폰은 없었지만 여러분들과 브런치에서 수다 떨 수 있어 심심하지 않은 출근길이었습니다.

TGIF, have a happy weekend!


*이미지출처: 전혀 심심하지 않았던 출근길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한컷 찍어 저장해 둔 내 핸드폰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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