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_자멸로 이끄는
“아, 인터뷰 일정을 가능한 뒤로 잡아달라고는 많이들 요청하시는데… 당장 내일이라고 하셔서 제가 조금 당황했습니다.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이내 차분하고 능숙한 응대로 다시 본래의 궤도로 돌아오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남자는 샤크컨설팅이라는 회사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대표님께서 내일 오후에 시간이 되시네요. 내일 세시 어떠십니까?”
“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이 번호로 저희 회사 홈페이지와 지원하신 포지션에 대한 설명 링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시 찾아보시려면 번거로우실 테니까요.”
8. 거울 속 남자의 모습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뜨거운 물로 가득 찬 욕조의 수면에서 수증기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수증기는 화장실 천장까지 올라가 뒤집어진 세상에 자리를 잡고 작은 물방울로 화해 몸집을 불려 나갔다.
-똑
욕심이었다. 기어이 한 줄기를 더 품으려다 불어난 몸을 지탱하지 못한 물방울 하나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갔다. 수직하강하며 되돌아온 탕아에 대한 환영일까. 욕조의 수면아래에서 공기방울 하나가 올라왔다. 공기방울은 수면에 닿는 순간 소리 없는 폭죽처럼 터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나로는 부족했는지 잠시 후 두 개 세 개의 공기방울이 연이어 올라와 터지며 수면 위에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아주 작은 동심원 몇 개가 수면 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수면은 다시 고요를 유지했다.
그때였다. 고요하던 수면 위로 갑자기 수십 개의 공기방울이 떼를 지어 올라오며 물거품을 만들었다. 동시에 수많은 물방울들과 물줄기들이 수면 위로 비산 했다. 제각각의 고점을 찍고 낙하하는 파편들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솟아올랐다. 그건 마치 두 개의 지각이 충돌하여 산맥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자의 상체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양 손바닥을 펴 이마에 들러붙어 눈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기고는 욕조의 한쪽 끝에 몸을 기대었다. 고개를 젖히자 물방울들이 잔뜩 맺혀있는 천장이 보였다. 하나, 둘, 셋... 헤아리는 물방울의 수가 백을 넘어가자 남자의 눈이 감겼다.
* * *
- 뽀드득
남자의 팔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수증기로 뿌옇던 거울에 손바닥이 지나간 길이와 폭만큼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렇게 대여섯 번 정도 왕복을 하자 남자의 상반신 전체가 거울에 비쳤다.
- 쓰으윽
면도기를 든 오른손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남자의 입과 턱 주위를 빽빽하게 감싸고 있던 수염들이 잘려 나갔다. 면도를 끝낸 남자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멀쑥한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어색했다.
짙은 눈썹, 그 아래 쌍꺼풀이 없는 적당한 크기의 두 눈. 검은 눈동자는 속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무심해 보였다. 사선으로 시원하게 쭉 뻗은 콧날과 막 면도를 끝낸 터라 푸르스름한 인중과 턱 주변, 거기에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남자의 각진 얼굴과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뒤돌아볼 만큼 매력적인 외모였다.
하얀 와이셔츠에 짙은 남색 계열의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는 현관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맨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느낌을 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짝 목부분의 조임을 풀면서 타이의 길이를 조절했다. 타이 손질이 끝나자 남자는 신고 있던 갈색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허리를 숙여 양쪽 구두코를 손으로 한 번씩 툭툭 털고는 현관을 나섰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가장 꼭대기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곧 남자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 * *
- 딩동
알림음과 함께 남자가 탄 엘리베이터는 바로 아래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중년의 여성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든 파란색 통을 들여다보느라 먼저 타고 있던 남자를 보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온 중년의 여성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선객이 있음을 발견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중년 여성의 입이 설계 한도의 최대치로 개방되었고 거의 동시에 핑크색 고무손 하나가 불쑥 올라와 급기야 최대치를 넘어 개방되려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내 중년 여성의 입에서 온갖 감탄사들이 조금의 쉴 틈도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아휴! 어쩜! 이게 누구야!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네! 나 원,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아니 웬 모델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나 했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허우대 멀쩡한 사람이 그래.. 이렇게 멋지게 하고 어디 나가는 거야? 취직이라도 한 거야?"
"아.. 네.."
이 시간, 이 아파트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호들갑을 몽땅 끌어다 쓰는 것 같은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남자는 늘 하던 대로 두 글자의 대답만을 간신히 입 밖으로 내놓았다.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큰 키가 더 커 보이네 그래. 앞으로 분리수거할 때도 이렇게 정장 입고 나와! 아주 사람이 그냥 180도 달라 보이네. 누가 보면 우리 아파트에 연예인이 사는 줄 알겠어! 호호호. 아휴 진짜 어쩜 이렇게…"
- 딩동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에 갇혀있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던 남자는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런 남자의 뒷모습마저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뒤늦게 따라 나오던 중년의 여성은 그만 반쯤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몸이 끼이고 말았다.
한바탕 난리를 떨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 중년의 여성은 그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 듯 괜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망할 엘리베이터는 또 센서 고장이네. 아휴, 관리실 오 과장 이 인간을 그냥.. 그나저나 오늘따라 참 빨리도 내려오네. 눈 깜짝할 사이에 1층이구만. 거 참 신기하네. 아 맞다! 수선동의서 받아야 되는데. 뭐 좀 늦으면 어때. 저렇게 멋있는데.. 아휴..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핑크색 고무장갑을 끼고 파란색 플라스틱 음식물 쓰레기통을 든 중년 여성의 혼잣말이 빈 복도에 의미 없이 흩뿌려졌다.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