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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an 09. 2024

‘외계+어’ 통역사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어디 보자,

오늘의 세상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려나.

기지개를 한 번 쭈욱 켜고 뉴스 기사를 훑어본다.


백수의 왕(사자 아님)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뭐가 필요할까 싶겠지만,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식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코미디인지 스릴러인지 장르가 헛갈리는

정치코너를 잠시 기웃거리다 오늘도 장르 파악에

실패하고 다음 섹션으로 넘어간다.

잠시지만 정치 섹션을 보느라 피폐해진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연예 섹션을 들여다본다.


흠.. 기안84 참 대단한 친구야.  

‘서울의 봄’도 ‘노량’도 아직 안 봤는데

둘 다 스코어가 대단하네.

치어리더의 비키니… 아니 이런 건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어이쿠 손가락이 미끄러졌네.


정치면에 비하면 한 없이 투명하고 맑고 재밌는

연예면을 기웃기웃 거리며 한창 즐겁게 기사들을

탐독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제목 하나가 있다.  


'외계+인 2부' 감독 “1부 끝나고 굉장히 힘들어..

실패 원인 주변에 물어봤다"


아니 최동훈 감독님, 그걸 꼭 주변에 물어보셔야

했나요? 감독님.. 진짜 왜 그러셨어요..

내 전우치 감동 돌려줘요..



“도사는 무엇이냐?

도사는 바람을 다스리고 마른하늘에 비를 내리고

땅을 접어 달리고 날카로운 검을 바람보다도

빨리 휘두르고 그 검을 꽃처럼 다를 줄 아니

가련한 사람들을 돕는 게 도사의 일이다.

무릇 생선은 대가리부터 썩는 법!

왕과 대신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아 이 도사 전우치가 친히 심부름을

하고자 왔으니 공치사 술 한잔 받을 일도 아니고.

내가 이 병 목을 치면 너희들은 어떻게 될 거 같으냐?


대사만 읽어도 가야금과 각종 전통 악기들의

신명나는 가락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한국 판타지 영화의 최고봉,

‘전우치’!

참, 근데 저 대사의 마지막 문장을 들려주고 싶은

분들을 아까 정치 섹션에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아무튼 전우치를 너무 감명 깊게 본 지라,

참치오빠는 안 나오지만 그만큼이나 화려한

주조연배우들에 대한 믿음!

급격히 발달한 CG기술에 대한 소망!

최동훈 감독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 신뢰의리로!

‘외계+인’ 1부가 개봉하자마자 보았다.

감독님..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심란한 마음에 제목을

클릭해서 기사를 읽어보니,

감독님께서 1부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2부에서는 노력해서 보완했다고 한다.


쓰읍…한 번 더 믿고 봐?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스토리,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뒤쳐지는 않는 슬기로운

백수가 되고자!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로 뉴스 섹션을

훑어보던 중!

 ‘외계+인 2부'를 봐야 할지 고민에 빠진 채!

시즌3 제25화 시작.




제25화. ‘외계+어’ 통역사


‘외계+인 2부’를 볼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외계인을 만나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다.

조우하자마자 ‘말도 안 통하는 새끼 인간 죽어라!’

하고 바로 죽임을 당해주기엔

마케팅커뮤니케이션으로 밥을 먹고살았던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이 대성통곡할 일이다.


1. 일단 환한 웃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2. 두 손을 활짝 펴 머리 위로 올려 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 뒤,

3. 편안한 분위기로 유도하기 위해 살짝 등을

바닥에 대고 드러누운 다음,

4. 반가움의 표시로 두 팔과 두 발을 흔들면…


아.. 이건 아니네.

십여 년의 세월은 그냥 대성통곡하는걸로..


로또도 사지 않았으면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네 바보형처럼,

외계인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외계인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할지를 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동네 와인 아저씨의 귀에

같이 사는 분의 하이톤 꾀꼬리같은 목소리가

안방 문을 넘어 거실로 들려온다.


“조금 답답하지 않아?”


자, 뜬금없지만 여기서 문제.


Q.  지금 위 문장의 ‘진의’는 무엇일까? (3점)

1) 처음 보는 외계인과 대화하려면 조금

답답하지 않겠어?

2) 춥다고 조끼를 입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답답하지 않아?

3) 아까 점심 먹을 때 좀 급하게 먹던데,

속이 조금 답답하지 않아?

4) 아무리 겨울이라도 적당히 환기도 좀 시켜야지,

 베란다 문 약간만 열어서 환기 좀 시켜!


정답은?


정답) 4번


아, 멀리 은하계에서 찾을 게 아니었구나.

우리 집에 있었다. 외계인.

우리 집에 있는 외계인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그와 함께 지난 십 수년간 벌였던 처절한

커뮤니케이션의 사투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직역과 의역, 오역과 왜곡으로 점철된 수많은 날들.

잠 못 들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던

그 처절한 해석의 밤들.


#1.

여기 TV를 보고 있는 한 사내가 있다.

오랜만에 보는 TV예능 프로가 너무 재밌어

낄낄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편안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한참을 TV에 빠져 보고 있는데 사내는 옆얼굴이

따끔거려 고개를 돌려 본다.

외계인 사내의 부인이다.


“과자 먹고 싶지 않아?”


여덟 글자의 저 심플한 질문에,

‘않아.’라고 사내도 심플하게 두 글자로 대답하고

싶지만 원만한 가정생활을 위해 그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여덟 자 속에 담긴 외계인 부인의

진의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1. 사내는 평소에 과자를 잘 먹지 않으며,

그건 외계인 부인도 잘 알고 있다.

2. 그러므로 사내가 과자를 먹고 싶은지를

알고 싶은 게 진의는 아닐 것이다.

3. 지금 두 사람뿐이므로 사내가 아니면

외계인 부인이 먹고 싶다는 뜻일 텐데..

4. 평소 그들의 집엔 과자가 없다. 믈론 지금도.

5. 다음에 장 볼 때 과자를 사도 되는 일이라면

굳이 지금 저 얘기를 꺼내진 않았겠지.


단계별 해석 작업을 통해 외계인 부인의 의도를

파악한 사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수능 언어영역 만점(에 가까운) 자이자,

대학시절 언어영역 학원 강사(알바)로 다져진

사내에게 이 정도 진의 파악은 이제 동시통역이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한 마디 정도는 하고 나가야 사내의 체면이 서겠지.

방문을 세차게 열며 기어코 한 마디를 던지는

사내다.


“새우깡이지? 매운맛 말고 쌀이나 오리지널로.”


좀 전까지 평화롭게 TV를 보고 있던 사내는,

이제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불혹의 나이에 절대로 타의로 과자 심부름을

나온 게 아님을 온몸으로 항변이라도 하듯

사내는 괜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어 본다.


하지만 잠시 후 검정 비닐 봉다리를 흔들며

다시 집으로 걸어가는 사내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심부름꾼의 그것이다.



#2.

여기 열과 성을 다해 저녁을 준비하는 한 사내가

있다. 새우와 편 썰기한 마늘을 볶고,

삶아 놓은 파스타 면을 오일소스와 함께

볶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치이익 소리가 귀를 자극하고

고소한 감칠향이 코를 자극하자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식욕이 끌어 올라온다.


한껏 귀와 코의 자극에 고무된 사내의 앞에

누군가 다가온다. 인덕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우자

사내는 팬에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외계인 사내의 부인이다


‘뭐지, 왜 입술을 달싹거리는 거지.

새우? 씻어서 볶았는데…

마늘? 꼭다리 따고, 편 썰기 했고, 모레까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마늘 먹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많이 넣었는데… 뭐지..’


이런 사내의 내심을 읽었는지,

이도 저도 다 아니라는듯 가소로운 표정을 짓는  

외계인 부인이다.

드디어 외계인 부인이 입을 연다.


“소스가 좀 남았네?

남은 소스병은 냉장고에 보관해야 하나?”


함정이다.

저건 남은 소스의 보관법이나 장소를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냉장고에 보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합리적인 토론을

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냉장고에 넣어야지! 이거 다 볶으면 냉장고에

넣으려고 했는데, 그냥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넣어야겠다!”

 

역시 이번에도 단번에 정답을 맞히는 사내다.


왠지 사내의 표정과 말투에 언뜻언뜻 찡그린 주름과

떨리는 음성이 섞여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외계인 부인의 알바는 아니리라.



#3.

한가롭게 노트북을 보며 뭔가를 두드리고 있는

사내의 옆으로 외계인 부인이 다가온다.


흠칫, 놀랐지만

전혀, 놀라지 않은 척


다문 입술의 양 끝을 한껏 끌어올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 사내를 보며 외계인 부인이 말을 건넨다.


“전에 내가 가져온 와인,

그거 너무 오래 두면 안 되지 않아?”


전혀 예상도 못했던, 너무나 갑작스런 주제라

진의를 파악할 틈도 없이 사내의 입이 열린다.


“아, 그거는 비싼 거라 몇 년을 두어도…”


미친 사내다. 뚫린 입이라고 저따위 망발을

말이라고 지껄이고 있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사내가

맹렬히 머리를 굴려 외계인 부인의 진의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외계인 부인이

굳이 오래 두면 상할까 걱정이 돼서 물어보는 건

절대로 아닐 터.

평소 셀러에 와인이 몇 병이 있는지

일말의 관심도 없는 외계인 부인이 지금 갑자기

보관 중인 와인에 대한 생각이 났을 리도 만무하다.

아, 오늘 무슨 날인가. 무슨 날이지??

아!! 맞다! 1월 1일!

그럼 저 질문의 의도는! 계 탔다!

신년맞이 하사주로구나!'


해석을 마치자마자 사내의 입이 자동으로 열린다.

외계인 부인의 진의를 오늘 그 와인을 따자는

것으로 100% 확신한 사내가 한껏 오버하며

정답을 외친다.


“아! 그 와인은 지금 따면 딱 좋지.

완전 맛있을 때지. 와 어떻게 알았대?

완전 소믈리에네!”



* 외전1

2024년의 첫날을 기념하여 외계인 부인이

예전에 선물 받아 집으로 가져온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와인을 오픈하는 사내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하다.


평소 맛보기 힘든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와인이라,

천천히 스월링하며 향도 맡아보고

조금씩 입안에 굴리듯 밀어 넣어

맛도 음미해 보며 이 순간을 영원처럼 즐기려던

사내의 귀에 외계인 부인의 탄성이 들려온다.


“와, 이건 진짜 맛있네.

나는 비싼 술 체질인가 봐”


한 잔만 마셔도 홍익인간(시처럼 빨갛게

인간)으로 변해 더 이상의 추가 잔은 거부하던

평소와는 달리 이미 한 잔을 다 비우고

두 번째 잔도 쭈욱 들이키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사내의 마음이 바빠진다.

일단 들고 있는 술잔을 단 번에 비우고 다시 채운다.

들이키고, 내려놓고, 따르고...

이제부터 속도전이다.



* 외전2

그렇게 속도전으로 행복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기분이 한껏 좋아진 사내다.

좀 전에 마셨던 와인의 여운이 사내의 마음을

잔잔하게 어루만진다.

마침 같이 사는 초딩도 해야 할 숙제를 다 끝낸

평화로운 저녁이다.


사내와 외계인 부인, 초딩.

세 사람은 이 평화로운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지 격렬한 평화로운 토론 끝에,

세 사람 다 좋아하는 보드 게임을 하기로

합의를 본다.


늘 그렇듯 게임의 세팅은 사내의 몫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즐겁다.

콧노래를 부르며 세상 행복한 얼굴로 각종 카드와

코인을 설명서대로 세팅하고 있는 사내다.


세팅에 열중이던 사내가 왠지 옆얼굴이 뜨끔거려

잠시 세팅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본다.

바로 옆에서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초딩이다.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와인을 마신 저녁이라

기분이 좋을 대로 좋아진 사내는 환한 표정으로

초딩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역시나 환한 미소로 바라보던

초딩이 입을 연다.


“아빠! 과자 먹고 싶지 않아?”


뭐.. 뭐야!! 이 꼬꼬마 외계+인은!!




*사진출처:pixabay, 영화 ‘전우치’ 스틸컷,

영화 ‘달콤한 인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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