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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an 02. 2024

운수 좋은 날 (feat. 風林火山)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저녁 무렵,

학원 셔틀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인

초딩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언제나 인자하고, 부드럽고, 사려 깊고,

젠틀한 애비의 기본 품성을 가득 담아

세상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본다.


“아빠!”

아 깜짝이야! 천둥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사정없이 강타한다.

그냥 스피커폰으로 받을 것을…


“어!!”

뭔가 크게 말해야 되는 상황인가 싶어

나도 사정없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응답해 본다.


“아, 귀 아파 작게 말해”

하아.. 네가 외친 ‘아빠!’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윗집 아빠도 놀라서 두리번거렸을 거란 말을

생략하고 다음 대사를 이어간다.


“알았어, 셔틀버스 탄 거 아니야? 무슨 일 있어?”


“아빠! 오늘 수업 늦게 끝난 애들 중에

셔틀버스 못 탄 애들이 있대. 그래서 걔네들 태우러

다시 돌아가야 된대. 집에 좀 늦게 도착할 거야!”


“아, 그래? 추운데 셔틀 놓쳐서 기다리는 애들도

힘들겠다. 알겠어. 조심히 와.

아, 참. 저녁에 뭐 먹고 싶어?”


“저녁? 음… 함박스테이크나 떡갈비 먹고 싶은데?”


“그래? 알았어. 좀 이따 봐”


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냉장실과 냉동실을 번갈아

열어보고 다시 살며시 닫는다.

떡갈비는 이미 예전에 다 먹었고, 함박스테이크는

하나 남은 걸 며칠 전에 내가 홀랑 먹었던 게

기억난다.


괜히 물어봤다.

물어보지 말걸.

그냥 알아서 할걸.


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말 그대로 이미 늦은 걸 어떡하랴.

다시 냉장고를 열어 좀 더 찬찬히 살펴본다.

냉동실에서 ‘맛있게 매운 쭈꾸미 볶음’ 한팩과

커다란 사각 투명 플라스틱통에 마트표

냉동대패삼겹살이 1/3쯤 남아있는 게 보인다.


함박스테이크와 떡갈비를 떠올려 본 뒤

매콤한 쭈삼쭈삼을 다시 떠올려 본다.

왼손에는 쭈꾸미팩과 오른손에는 냉삼팩을 들고

망설인다.


'해? 말어?'


다시 내 불치병중 하나인 ‘경미한 의사결정장애’가

발동하려 한다. (시즌3, 제21화 참조)

여기서 발동이 걸리면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직감하고 냅다 뜨거운 물을 받아 냉동 쭈꾸미팩을

담가버린다. 이제 기호지세다.

* 기호지세: 랑이에 탔으니 대로 게 타자


프라이팬을 꺼내 팩에 남아있던 냉삼을 모조리

프라이팬 위로 쏟아붓는다.

재빨리 인덕션에 불을 올리고 얇은 냉삼이 완전히

익기 전에 집게와 접시를 찾아온다.

갈색으로 적당히 익은 테두리면과 부드러운

안쪽면의 적절한 조화가 냉삼 굽기의 생명이다.

조금 이따 쭈꾸미 볶을 때 같이 한 번 더 볶을 거라

과하게 익히는 것보단 차라리 살짝 덜 익히는 게

낫다. 과유불급이다.

* 과유불급: 하면 급이고 과하면 제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스토리,

‘마법천자문’ 같은 요상한 느낌의 서두를 읽으며

시즌3, 제24화. 비로소 시! 지을 작! 시작!




제24화. 운수 좋은 날 (feat. 風林火山)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초딩에게

빨갛게 잘 볶은 쭈삼쭈삼과

유튜브를 보고 사이다로 만들어 본 오이 피클을

같이 내어 준다.


처음엔 쭈삼쭈삼과 애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애비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애비와 딸의 눈과 눈이 마주치며,

말없이 눈빛으로 얘기들이 오고 간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안다.

네가 오늘 저녁으로 요청한 떡갈비나

함박스테이크와 지금 네 앞에 놓여 있는

쭈삼쭈삼과는 한 여름과 한 겨울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음을 애비도 잘 알고 있다.


그래, 그 다음 말도 다 안다.

이럴 거면 아까 전화로 저녁에 뭐 먹고 싶은지는

왜 물어봤냐는 거겠지.

애비가 경솔했다. 냉장고를 한 번 보고 물어봤어야…

아니 애초에 저녁 메뉴를 너한테 위임하는 게

아니었는데…애비의 불찰이다.

유구무언이다.

* 유구무언: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리한 쟁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을 너 보다 수 십 년은

더 살아온 애비의 위기대처능력을 무시하지 마라.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이 불리한 상황에서

쉬지 않고 단 번에, 한 문장으로 해야 할 모든 얘기를

쏟아부으며 얼떨결에 한 입 먹게 만듦으로써

적을 초딩을 제압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일단 한 번 먹어봐.

그래도 불만이면 그때 얘기해.

떡갈비나 함박스테이크는 이번 주말에 해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리 쭈꾸미 한 점,

냉삼 두 점, 그리고 피클 하나까지.

완벽하게 초딩의 숟가락 위에 세팅해 놓은

삼합 한입을 초딩의 입에 물려준다.


뭔가를 얘기할 틈도, 잠깐의 반항할 틈도 주지 않은

애비의 선빵에 초딩은 급 당황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입을 벌리고 숟가락을 덥석 문다.


상황종료다.


“어때? 맛있지? 맛있지?”

거듭된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우걱우걱 밥과

함께 쭈삼합을 먹는 초딩을 보며 승리를 직감한다.


이제 마지막 일격을 가해 본다.

사실 이 마지막 일격은 정말 조심히 써야 한다.

잘못했다간 피박에 독박을 쓰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고위험 고수익, 보다 전문 용어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기술이다.


“맛없으면! 아빠가! 지금이라도! 떡갈비나

함박스테이크 사 온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호기롭게 질렀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내심 불안함이

몰려온다. 이윽고 밥과 함께 쭈삼합을 삼킨 초딩이

입을 연다.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꿀꺽’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완전 맛있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적군을 내려다보는 장군의

심정이 이러할까.

정신없이 수저를 움직이는 초딩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오늘 나의 완벽한 전략을 떠올려 본다.


風林火山(풍림화산)

손자병법을 쓴 손무가 전쟁에 임했을 때 장수가 휘하 부대를 움직일 전략에 대해 쓴 부분이다.  


風, 바람처럼 빠르게

林, 숲처럼 고요하게

火, 불처럼 맹렬하게

山, 산처럼 묵직하게


風- 함박스테이크나 떡갈비가 없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대체 메뉴인 쭈삼을 기획한다.

林- 다시 콜백 해서 지금 집에 떡갈비가 없니,

이것도 괜찮지 않겠니 하는 부산을 떨지 않고

고요하게 대체 메뉴를 진행한다.

火- 집에 와 쭈삼을 보고 당황한 초딩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맹렬하게 쏟아부으며 숟가락을 입에 물린다.

山- 묵직한 태도로 자신감을 갖고 메뉴를

바꿔줄수도 있음을 제안하며 나의 승리를 확신한다.


이렇게 애비가 만들어준 쭈삼쭈삼과 사이다로 만든

피클을 뚝딱 비운 초딩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실로 향한다.

소파에 털썩 앉아 부른 배를 슥슥 문지르며

컨트롤러를 집더니 게임기를 켠다.

몇 개의 게임 사이에서 방황을 하던 커서는

결국 동물의 숲을 선택한다.


평화로운 동숲 마을이 거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린다.

처음 이 게임을 샀을 때 아빠도 같이 하자는

초딩의 꼬임에 홀랑 넘어가 정말 신나게 내 집을

짓고 방을 늘려갔다.

방의 개수가 늘어나고 늘어난 방을 예쁜 가구들로

채우면서 너굴은행에서 받은 대출금들은 엄청난

액수로 늘어났다.

대출금을 그대로 두고 태연하게 동숲을 즐길 수

있다면 본인이 한국인임을 의심해봐야 한다.

정말 피땀 흘려가며 무를 심고, 바닷속 잠수해서

해산물을 잡고, 광석을 케고...눈물 없인 볼 수 없을

처절한 대출금 상환의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엄청난 액수의 대출금을 다 갚고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접속한 나의 집에는…


가구란 가구는 모두 사라지고,

주머니와 보관함에 있던 돈과 진주를 비롯한

각종 진귀한 아이템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휑하게

사라져 있었다.

애비의 모든 돈과 아이템들을 팔아서 수 백 벌의

옷을 구매한 초딩의 경악할 짓임을 확인하고

그때 애비는 눈물을 삼키며 게임을 접었다.


소파에 거의 누운 자세로 세상 화려하게 단장한

본인의 집안에서 수 백 벌의 옷을 가지고 패션쇼를

하고 있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화병이 도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린다.



이제 애비의 시간이다.

쭈삼쭈삼과 피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까베르네소비뇽 한 병.

같이 사는 분은 저녁 약속이 있어 늦게 들어올

예정이고, 나는 초딩 저녁까지 다 먹이며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다 끝냈다!


영롱한 붉은빛의 레드 와인 한 모금을 식도로

넘긴다. 부드러운 비단천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그대로 위로 흐르는 느낌이다.

뭐 베리류의 향이니, 산미, 탄닌…

지금 이 순간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젓가락을 들어 적당히 매콤한 쭈꾸미와

잘 익은 냉삼 두 점을 숟가락에 올린다.

마지막 화룡점정!

오이피클을 가장 위에 올린 뒤 맛을 음미한다.

* 화룡점정: 가가 을 그릴 때 점 완성에

다다를수록 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렇게 초딩은 동물의 숲에 빠지고,

나는 와인의 바다에 빠지는 평화롭고 행복한 저녁…

일 줄 알았는데!


“아빠! 나 오늘 방송댄스 수업!!”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같이 사는 분이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초딩 저녁 먹이고, 8시 30분까지 옆 동네 청소년

수련관에 데려다줘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지금 내 등 뒤로 흐르는 건 식은땀일까.


“괜찮아!! 아직 안 늦었어! 택시 타면 금방이야!”


다시 한번 풍림화산이다!


 - 잠깐의 생각할 틈도 사치다. 

재빨리 들고 있던 젓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앱을 켜서 택시를 부른다.

- 짧은 대화도 사치다. 둘 다 고요히 아무 말도

없이 양말을 신고 패딩을 걸치고 신발을 신는다.

 - 택시가 현관 앞으로 오는 길은 하나뿐이다.

1초라도 시간을 줄이고자 맹렬히 그 길을 달려간다.

 – 깜빡이를 켜고 서행으로 오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고, 절대로 늦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그저 묵직하게 목적지에 다다르기를 기다린다.


8시 30분 시작인 수업에, 8시 29분에 초딩을

연습실로 들여보내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아, 어쩐지 오늘 저녁 너무 쉽게 와인 타임을

가진다 했다.

좀 전까지 내 앞에 펼쳐져있던 쭈삼과 와인병,

와인잔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와인을 땄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박나비야...


어느 운수 좋은 날 밤이다.



* 매콤한 쭈삼과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 한 종

추천드립니다.

'울프 블라스 옐로우 라벨'

(Wolf Blass yellow label)입니다.

레드로는 까베르네 쇼비뇽 품종도 있고

쉬라즈 품종도 있는데 둘 다 괜찮습니다.

와인 이름은 독일에서 호주로 이주한 설립자의

이름에서 따왔고,

위스키인 조니워커 레드/블랙/그린/블루처럼

이 와인도 컬러로 등급이 나뉘는 재미가 있습니다.


블랙, 그레이, 골드라벨의 더 상위 등급도 있지만

늘 가성비를 추구하는 저희에게는 옐로우 라벨도

아주 좋습니다.

처음 한 모금을 넘기면, 예상 못한 단 맛이 퍼지며

'어? 이 와인 맛있다'는 생각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모스카토와 같은 단 맛은 아니니 너무 스윗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주를 대표하는 와이너리의 와인답게

꽤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와인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대접하기에도

괜찮은 와인입니다.


상시가 만 원 후반 대이며, 행사가 만원 초중반으로,

행사가에 구매하시면 가성비 좋은 와인입니다.

그럼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생활을 기원하며,

이만.





*사진출처:pixabay, 영화'곡성'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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