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그래. 박나비.
이번엔 휴재 공지를 하자. 한 번 할 때가 됐다.
이야기의 퀄리티는 차치하고
그동안 펑크 한 번 안 내고 써왔으니
이번 한 번쯤은 휴재를 해도 괜찮다.
아니다. 박나비.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다.
얄팍하게 머리 굴리지 마라.
머릿속에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리니까.
한 번이 어렵지, 그 뒤로는 이유가 생겨서 휴재를
하는 게 아니라, 휴재를 하기 위해 이유를 찾기
시작할 게 눈에 선하다.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잤습니다’라고
한 줄이라도 써라.
반드시 발행하라고 등 떠미는 사람도,
휴재한다고 아쉬워할 이도 별로 없건만,
괜스레 휴재와 발행 사이에서 백팔번뇌를 하고 있는
가련한 미소년을 수다의 소재로,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3, 제23화 시작.
제23화. 신에게는 아직 한 시간의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약 2주가량 남겨둔 12월의 어느 날, 같이 사는 분이 우리 가족이 12월 24일에
베트남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체코,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 태국,
싱가포르, 대만…
출장이나 여행으로 가 본 나라들의 목록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베트남은 기억에 없다.
베트남에서도 푸꾸옥이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에 해당한다는 휴양지를
간다고 하는데, 몇 년 전부터 휴양지를 알아볼
정도의 물질적, 정신적 여유를 잃은 내가
저 도시를 알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장기간
백수의 왕(사자가 아니다.)으로 지낼 수 있게
해 준 건 8할이 눈치와 과묵함인 만큼,
이렇게 갑작스러운 여행 통보에도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 사안이 이미 결정이 된 상황임을,
협의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확정된 상황임을
눈치로 때려잡고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왜 그곳을 가야 되는지,
가서 어디를 다니는지,
어떻게 그곳을 가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등
이미 확정이 다 되어 있을 여러 사안들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입게 될
설화(전설이 아니다.)를 말없이 행복한 미소만
머금으며 리엑션 하는 것으로 원천차단한다.
이렇게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생전 처음으로
베트남을 가게 되었고 통지를 받은 지 이주일이
지나 23일 저녁이 되었을 때,
같이 사는 두 명의 여성이 짐을 싸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우리가 이민을 가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며 비로소 여행을 실감한다.
이 의구심은 초대형 캐리어에 담기는
두 여성의 짐이 산처럼 쌓여갈수록 높은 확률로
확정적 사실에 가까워져 갔고,
초대형 캐리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끊임없이
들어오는 짐들에 자신의 광활한 공간을 모두
점령당하고 더 이상 여분의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없게 된 초대형 캐리어의 초라한 모습을 직관하면서
내 눈도 초점을 잃어갔다.
왜 너는 짐을 안 챙기냐는 그녀의 말에,
나는 구석에 찌그러져있는 내 백팩으로 답했다.
4박 동안 있어야 되는데 그걸로 되겠냐는 그녀의
말에, 나는 되는데 그쪽은 40박은 너끈할 거 같다는
말을 간신히 속으로 주워 삼키며
말없는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드디어 12월 24일.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난다.
11월부터 혼자 세워 두었던 나만의 2023년 연말
계획 따위는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오래 붙잡고 있으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재빨리 놓아버린다.
잘 가, 낮에 혼자 볼 계획이었던 영화들아.
잘 가, 밤에 혼자 마실 계획이었던 와인들아.
잘 가, 새벽에 혼자 읽을 계획이었던 책들아.
그렇게 내가 세운 연말의 계획들과
마음속 소소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저가항공이라 밥이 나오지 않으니 타기 전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고,
가는 동안 소화가 다돼서 출출해지면 비행기 안에서
컵라면 소짜를 5천 원이나 주고 사 먹을 순 없으니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미리 사두어야
한다는 같이 사는 분의 지혜의 말을 경청하며
전자의 메뉴는 초딩의 뜻에 따라 롯데리아로 정한다.
세 명이 다 똑같이 불고기 버거를 먹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겁없이 튕겨내고 더블업 버거를
시켜 먹었고, 표준 사이즈 삼각김밥을 세 개 사라는
무언의 눈빛도 과감히 흘려내며 하나는 큰 사이즈
삼각김밥을 사는 도발도 해보았으니,
예상치 못한 여행에 대한 반항을 아예 해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물론. 당연히. 이 모든 반항의 수고는
탄수화물 과잉 섭취라는 무시무시한 부작용만
남긴 채 수포로 돌아갔고,
나는 다만 더블업 버거로 인해 더부룩해진 배만
살살 문지르며 기내에 탑승했다.
성공하면 혁명이었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정시에 출발한다던 비행기는 안전벨트를 묶은 채
얌전히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들에게 활주로에
비행기가 너무 많아 45분가량 지체가 될 거라는
당최 이해가 1도 되지 않는 메시지를 기내방송으로
내뱉으며 부릉부릉 가지도 않을 거 시동만 걸어대고
있다.
진심 1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활주로에 비행기가 많지, 그럼 뭐
우리 외할머니 집 앞마당에 비행기가 많을까.
그 많은 비행기들 이착륙 시간을 감안해서
출발 시간을 확정했을 텐데,
왜 우리 비행기만 방귀만 끼고 출발도 못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승객 여러분, 기장입니다.
정시 출발을 해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봤는데
불행히도 실패했습니다.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에는 돈으로 밀렸고,
타 저가항공사들에게는 짬으로 밀렸습니다.
사실 지금 옆에 출발하고 있는 저 새끼 쟤보다는
빨리 갈 수 있었는데,
제가 저번 주에 관제탑 저 새끼 직원과 한판 해서
결국 짬도 안되는 저 새끼 쟤한테도 밀렸습니다.
이래저래 돈에 밀리고, 짬에 밀리고…
저도 짜증 나는데 이따 올라가면 오토파일럿 맡기고
소맥 한잔 말아먹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튼, 45분 정도 밀렸는데, 어차피 비행기 밖으로
못 나가게 된 거 승객여러분의 정신건강을 위해
원래 비행시간이 6시간이 아니라 7시간인 것으로,
지금 우리는 활주로에서 출발도 못하고
빌빌대는게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을 날고있는 것으로
척각해주시고, 핸드폰 게임을 하시든 다운받아온
영화를 보시든 알아서들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디스 이즈 캡틴 스피킹~”
이라고 말을 해주면 조금 이해를 해보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현지시간 밤 9시 30분 도착 예정이었던
우리 비행기는 10시 30분이 넘어
푸꾸옥 인터내셔널 에어포트에 그 육중한 궁둥이를
들이밀며 무사 착륙을 할 수 있었고,
보잉 737기를 가득 채웠던 승객들을
무려 3명이나 되는 푸꾸옥 입국 심사직원분들이
성대하게 맞아주셔서 거의 12시가 다되어서야
호텔로 가는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서울에서 유유자적 한량처럼 지내던 내가
갑자기 짐꾼이자(이건 잘 알 테고),
줄꾼이자(모든 줄 서는 곳에서 차례가 다가오기
전까지 미리 혼자 줄 서 있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내니(한 명이 선베드에 누워서 책을 볼 때 아이를
일대일로 전담하는 사람)로
베트남에 끌려가게 된 사실을 안타까워한 친구 J가
한국에서 푸꾸옥 호텔로 바로 주문해 준
‘베트남 열대 과일 종합 선물세트’를 로비에서
찾으며 여행 첫 째날을 조용히 마감했다.
전 날 친구 J가 선물해 준
‘베트남 열대 과일 종합 선물세트’의 효과였는지,
같이 사는 분으로부터 아침 조식의 피날레
‘마무리 입가심 커피’ 한 잔을 자리에 앉아 대접받는
과잉 친절도 경험하고,
낮에 수영장에서 열심히 초딩이랑 놀고 있으니
몰디브는 아니지만 모히또 한 잔을 얻어먹는 호사도
누려본다.
하지만 이런 호사들은 지금 할 얘기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12월 24일 여행 당일 집에서부터,
공항으로 향하는 6300번 버스 안에서도,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하면서도,
비행기를 타기 직전 더블업버거를 먹으면서도,
딜레이가 된 비행기 안에서 안전벨트를 맨 채 영화하나 다운받아 오지 않은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푸꾸옥 입국심사장의 만리장성 같은 대기라인에
외로이 홀로 줄을 서 있으면서도,
호텔로비에서 친구가 주문해 준 과일을 자랑스레
선보이며 앞장서서 보무도 당당히 엘리베이터를
향하면서도,
조식식당에서 원조 베트남 쌀국수에 마늘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면서도,
지금 이렇게 어떻게든 휴재 공지를 하지 않고
뭐라도 써보겠노라고 노트북은 안 챙기고
블루투스 키보드 하나 달랑 챙겨 와서
호텔 화장실 머그컵을 거치대 삼아
핸드폰을 세로로 세워두고 이 글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내 모든 관심과 주의는 오직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제23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몰두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니 23화를 읽기 위해 나의 브런치를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께 엎드려 사죄드리니
부디 너른 아량으로 이 모든 참사를 용서해 주시길.
*죄송합니다.
(아마)세상에서 가장 긴 휴재 공지글로
이렇게 23화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휴재와 발행 사이에서의 번뇌는 결국 이처럼
휴재공지를 발행글처럼 길게 쓰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나봅니다.
그래도 명색이 일상와인스토리인지라
와인 한 마디는 남겨야 될텐데…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관계로
와이너리 투어까지 관광상품으로 있는
어엿한 와인 생산국이라고 합니다.
달랏의 라도라(Ladora) 와이너리의 와인을
동네 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하니,
일단 이번 여행 기간 중 한 번 마셔 보고
추후 공유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어떻게 끝맺어질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사는 분과 초딩, 두 여성이 네일아트인지를
하러 나가면서 기적처럼 제게 주어진 한 시간이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끝났다고 톡이 오면 바로 나가야 하는 짐꾼이자
줄꾼이자 내니인 제 상황을 부디 이해해 주시고,
이번 글이 어디서 끝나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