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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Dec 12. 2023

별처럼 수많은 ‘무’ 중에 그대를 만나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나에게는 몇 가지 불치병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경미한 의사 결정 장애’다.

(나머지 불치병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따로 알려드리겠다.)

여기서 ‘경미한’은 ‘의사 결정 장애’를 수식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의사 결정 장애’의 대상이 되는 사건의 가벼움을

의미한다.


‘이사’나 ‘이직’과 같은 인생에 몇 번 없을 중대사는

결정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니 오래 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속전속결로 해치워 버린다.

그렇게 옮긴 회사가 하나, 둘, 셋, 넷…

그만 세어보자.


반면에 ‘음식 메뉴 정하기’,

‘주차된 따릉이 중에서 제일 깨끗한 따릉이 고르기’

와 같은 이게 고민할 일인가 싶은

일상 대부분의 범사들에는 정말 괴로울 정도로

심각한 의사 결정 장애를 보인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핵미사일 발사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 두고

누를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초긴장 상태가 된다.


이 ‘경미한 의사 결정 장애’의 증상이 극도로

발현되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어디냐면…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3 제21화 시작.




제21화. 별처럼 수많은 ‘무’ 중에 그대를 만나


쌀쌀한 12월의 어느 늦은 저녁,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주머니엔 녹색 에코백을

쑤셔 넣은 후 집을 나선다.


마트에 가는 길이다.

정확하게는 마트에 ‘무’를 사러 가는 길이다.

저녁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다 끝낸 이 늦은 시간에,

더구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12월의 캄캄한 밤에

굳이 ‘무’를 사러 가야 하는 긴박한 이유가 있을까.


… 슬프게도 있다.

사건의 발단은 오늘의 저녁 메뉴가 ‘어묵탕’으로

정해지면서부터다.



같이 사는 분이 퇴근 전에 톡을 보내온다.

저녁엔 ‘어묵탕’을 먹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였고,

나는 그 제안을 즉시 수락했다.

엄밀히 얘기하면 ‘제안’ 보다는 ‘지시’가,

‘수락’ 보다는 ‘수행’이 맞겠지만,

뭐 단어 선정과 같은 소소한 권한은

글을 쓰는 사람이 가지는 아주 미세한 특권 중

하나로 남겨 두자.


냉장고에 있다는,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다는

‘모둠 어묵탕 키트’를 찾아 꺼낸다.

납작한 사각형 어묵, 동그랗고 긴 어묵,

조그만 동그랑땡 같은 어묵, 양갱같이 네모로 긴

어묵, 모든 어묵 중에 혼자만 붉은빛으로 튀는

조금 매운 어묵까지. 종류별로 다양한 어묵이

시원한 국물 맛을 내어 줄 스프와 함께

풍성~하게 들어있다.


처음 끓이는 어묵탕이라 봉지 뒷부분 설명서를

한 번 읽어본다. 세상에 이건 라면 끓이는 것보다

더 쉽다. 냄비에 어묵과 물과 스프를 넣고 끓이면

끝이다.


정수기 앞에 냄비를 놓고 쪼로록 물을 받는데

뭔가 생각이 떠오른다.


'아, 무를 넣자!'


뜨끈한 어묵탕에 들어 있는 부드러운 무가 얼마나

맛있는가.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냉장고 야채칸을

뒤진다.  마침 반쯤 남았지만 제법 큰 덩어리의 무가

야채칸 한 구석에 보인다.


유레카!

대충 큼직큼직하게 썰어 냄비 바닥에 깐다.

다 쓰기에는 양이 좀 많은 감이 있어 1/3 정도는

다시 야채칸에 넣어 둘까 하다가

쓰임 없이 나중에 버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모조리 냄비에 때려 붓는다.

어묵보다 무가 더 많은 것 같은 느낌이지만 괜찮다.

나는 무를 좋아하니까.


뭔가 우쭐한 기분이다.

같이 사는 분은 어묵탕 키트 로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무까지 척척 썰어 넣어 보다 완벽한

어묵탕을 만들어낸 내 자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서 무가 곁들여진

이 완벽한 어묵탕을 보면 깜짝 놀라겠지.


“아니, 무 넣을 생각은 어떻게 했대? 대단하네!”


그럼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정도를 취해주면 얼마나 멋져보이겠는가.



잠시 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같이 사는 분이

무가 곁들여진 이 완벽한 어묵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어본다.


“무, 다 썼어?”


아니 놀라는 거 까지는 예상대로인데, 대사가 좀…

요즘 무가 많이 비싼가. 반응이 왜 이렇지.

뭐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므로

당당하게 무를 다 썼노라 대답한다.

대답할 때 왠지 열중쉬어 자세를 한 것 같고,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이건 보일러를 안 틀어 집이 조금 쌀쌀해서였을 뿐

절대 두렵거나 긴장해서는 아니었다.


“아… 이건 스프만 넣고 끓이면 되는 즉석 키트여서

굳이 무 안 넣어도 되는데… 냉장고에 무는 내일

먹을 삼치조림 할 때 쓰려고 남겨 둔 거라서...”


그렇게 무를 안 넣어도 되는 즉석 어묵탕 밀키트에

제법 큰 무 덩어리를 남김없이 남용한 대역 죄인이

되어 조용히 저녁을 차린다.


나와 초딩의 그릇엔 어묵과 무를 1:1의 비율로 담고,

괜히 무를 많이 담으면 또 한 소리 할 것 같은

같이 사는 분의 그릇엔 거의 어묵으로만 담는데..

무 없이 어묵으로만 채워지고 있는 자신의 그릇을

보며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자연스레 토렴 하듯 그릇의 어묵을 냄비에 붓고

다시 그릇을 채운다.

이분의 그릇도 어묵과 무, 1:1의 비율로.


식사 중 무를 한 번 더 리필하며 어묵보다 무를 더

많이 먹는 심각한 언행불일치를 보이며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내더니, 내일 바쁠 것 같아 오늘 밤에

삼치 조림을 해 놓으려고 했는데 이제 집에 무가

없다며 다시 무타령을 시작한다.


하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

올라온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뜨거운 무언가가 드디어

입으로 나온다.


“다 먹었으면 설거지한다?”


조용히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끝낸 후 아직도

무 타령인 분을 바라보며 싱크대 서랍에서

마트 전용 초록색 에코백을 꺼낸다.

조용히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는다.


"마트 갔다 올게!"


그제야 하던 무 타령을 멈추고

‘날씨가 많이 추운데', '내일 가도 되는데’와 같은

말로 최후의 시험에 들게 하지만...

어림없다.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여기서 넘어가면 꿈에서도 무타령이 나올 게 뻔하다.


"아니야, 소화도 시킬 겸 산책 삼아 다녀올게"


더 보탤 것도, 더 뺄 것도 없는 저 완벽한 문장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찰나의 고민도 없이

무조건 반사로 내뱉고는 집을 나선다.


12월, 영하의 늦은 밤에 무를 사러 마트로 가게 된

이유다.



추운 날씨에 종종거리며 마트로 왔지만,

막상 도착하니 기분이 좋다.

이상하게 마트만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박물관류를 좋아해 근처만 가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시즌2, ‘제14화 박물관과 붕어빵’ 참조)

마트 또한 나에게는 그런 곳이다.


사지도 않을 한우를 잠시 구경하다가 반찬 가게

반찬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마음속으로 품평을 한다.

냉장 코너에서 각종 치즈도 구경하고

수산물 코너에서 포장회와 초밥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야채 코너 앞이다.


마침 저 앞에 작은 산처럼 쌓인 무 더미가 보인다.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진다.

100여 개는 됨직한 거대한 무의 더미 앞에서

나는 좌절한다.


‘아, 여… 여기서… 하나를.. 고르라고??’


떨리는 손으로 가장 앞에 있는 무를 집으려다

흠칫 멈춘다.

다른 것들에 비해 조금 작아 보인다.

손을 옮겨 그 위의 무를 향한다.

아니 이럴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상황을 너무 지엽적으로 보고 있다.

전체 무 더미가 이렇게 큰데 나는 왼쪽 아래 지극히

일부분에서만 고르려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대국적으로 봐야지.


눈을 돌려 무 더미의 제일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주욱 훑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좌절한다.


갑자기 무가 엄청나게 필요한 누군가가 나타나

무를 딱 하나만 남기고 다 쓸어가는 상상을 해본다.

비현실적이다.


모든 무가 길이, 둘레, 색깔 비율(녹색과 흰색의),

흙이 묻은 정도까지 다 똑같은 규격으로 포장지에

담겨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더 비현실적이다.


아니 지금 1,590원짜리 무를 하나 사면서 이게

이럴 일인가.

비틀대는 몸에 힘을 주고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린다.

나는 오늘 무를 하나 반드시 사야 하고,

여기 있는 모든 무들은 마트 신선식품 담당자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한 최상의 상품들이므로

어떤 무를 고르더라도 괜찮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다시 무 더미로 손을 뻗는다.


집은 무를 그대로 장바구니에 담고는

재빨리 뒤돌아선다.

뒤돌아보지 말자.

절대 뒤를 돌아봐선 안된다.

지금 뒤돌아보면 모든 게 끝이다.

지금 뒤돌아보면 장바구니에 담긴 이 무보다

저 뒤에 남은 모든 무들이 더 좋아 보일게 뻔하다.


뒤로 돌아가려는 목을 안간힘을 다해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떨어지지 않는 발을 무 더미와

반대 방향으로 전진시킨다.

그렇게 야채코너를 벗어나서야 크게 한 번 숨을

쉬어 본다.

드디어. 끝났다.


멍에를 벗은 소 마냥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이제 좋아하는 와인 코너로 뛰다시피 걸어간다.

뒤에서 보면 씰룩 씰룩 웃겨 보일 것 같지만

뭐 상관없다.

나는 백 개가 넘는 무 중에 딱 하나를 고르는,

C‘M’O(최고 '무’ 결정책임자)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고 성실히 수행했으니.


이제 즐겁게 와인 코너를 구경할 시간이다.

저번 세일 행사 때 구매한 와인의 상시 가격을 보고

흐뭇해하기도 하고, 새롭게 세일에 들어간 와인을

만지작 거리며 살까 말까 망설이기도 하며

이 시간을 만끽한다.


무를 고르는 것에 비하면 와인 고르기가 백배는

더 쉽다.

마음속으로 정한 가격대 내에서 안 마셔본 와인을

고르면 어떤 맛일지 설레는 즐거움이 있고,

입맛에 맞는 마셔본 와인을 고르면 그 맛이 예상이

되어 또 즐겁다.

이러나 저라나 와인을 고르는 건 정말 쉽고

즐거운 일이다.  


결국 오늘 밤에 마실 와인 한 병을 무가 들어있는

장바구니에 슬며시 밀어 넣고는 와인 코너를 떠난다.

무 더미를 떠날 때처럼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고,

고개가 돌아가지만 여기서는 괜찮다.

아쉽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몇 번을 멈추고

또 그만큼을 뒤돌아본다.

또 보자 얘들아.


계산대로 향하려다 문득 발을 멈춰 세운다.

오늘은 좀 편하게 아예 페어링 할 음식까지 사서

가기로 한다. 멈춰 세운 발을 돌려 마트의 포장음식

코너로 향한다.


탕수육, 양장피, 샐러드, 족발, 소떡소떡…

때마침 저녁시간이 훌쩍 지난 뒤라 40% 세일이

들어간 할인가로 판매 중이다!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코너를 둘러본다.

투명한 돔 모양 플라스틱 뚜껑으로 덮여 있는

커다란 원통형 종이박스가 눈에 띈다.

그 속은 치킨으로 한 가득이다.


유레카!

얼른 손을 뻗어 40% 할인된 가격의 원통형 치킨

박스를 집으려는데, 옆에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어라, 이게 닭다리가 더 큰 거 같은데?

고민을 하며 그 위를 보니…

원통형 치킨박스가 10개는 더 보인다.

아… 오늘 밤 마트에서의 세 번째 좌절이다.  


* 40% 할인가로 구매한 치킨과 페어링 할

오늘의 와인은 '라파우라 스프링스 리저브 소비뇽블랑(Rapaura springs reserve)'입니다.

'라파우라'는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 내의 지명으로,

와이너리의 이름인 '라파우라 스프링스'는

'라파우라의 샘'을 뜻합니다.


소비뇽블랑 품종이니 화이트 와인이고

(이제 이 정도는 우리 기본이잖아요!),

다른 가벼운 소비뇽블랑 와인들에 비하면

조금 바디감이 있는 편입니다.

소비뇽블랑 특유의 열대계열 향이 느껴지며,

종합적인 밸런스가 참 좋습니다.

은은하게 피어 나는 산뜻한 풀향이 치킨의 기름기를

재워주기 때문에 정말이지 완벽한 조합입니다.    


와인코너에서 이 와인을 고르실 때

한 가지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라파우라 스프링스’만 보고 집을 경우 리저브가

아닌 일반 '라파우라 스프링스'를 갖고 오실 수도

있습니다.


소비뇽블랑으로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 '라파우라 스프링스 소비뇽블랑'과 지금 소개드리는 '라파우라 스프링스 리저브 소비뇽블랑'이 있습니다.

이 무슨 틀린 그림 찾기 같은 이름도 아니고...

'리저브'가 붙냐 안 붙냐의 차이인데,

보시게 되면 '리저브'가 붙은 와인으로 드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가격 차이는 3~4천 원 정도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일반과 리저브 둘 다 드셔 보시고

입맛에 맞으시는 걸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모두의 입맛은 다르고,

우리의 3천 원은 소중하니까요!

리저브 기준 상시가 3만 원 중후반대,

행사가 2만 원 중반 대입니다.

행사가로 구매하시길 권해드립니다.  


 * 시즌2를 마무리 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시즌3를 너무 일찍 시작한 게 아닌지 우려됩니다.

너무 길어 지루해하시진 않을지,

내용이 재미는 있을지… 매 화 발행 때마다 하는

고민이지만, 시즌3의 첫 화를 발행하는 오늘은

유독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부족하더라도 재밌게 읽어주시고,

짧은 한 줄로라도 응원의 말씀 주시면

큰 힘을 받을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소심쟁이에게 계속 쓸 수  있는 힘을

보태주시길.


시즌3는 연재 브런치북으로,

매주 화요일 발행할 계획입니다.

펑크 내지 않고, 성실히 연재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마셔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많관부!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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