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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an 16. 2024

제사와 산적대왕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아, 다시.

우리 집은 예전엔 제사를 지냈었다.


아니, 다시 다시.

우리 집은 예전엔 제사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거의 지내지 않는다. 


응?

제사를 지내면 지내는 거고.

안지내면 안 지내는 거지.

거의 지내지 않는다는 건, 그 무슨 갈비 뜯고

앉아있으면서 '거의 비건에 가깝죠' 같은 소리냐고?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스토리,

갈비 뜯는 비건을 보는 듯한 의문을 품고

시즌3, 제26화 시작.




제26화. 제사와 산적대왕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일 년에 대여섯 번 정도

제사를 지냈다. 큰 집이었던 탓에

(아버지가 장남이라 ‘큰 집’이지 말고, 진짜 대저택

이어서 ‘큰 집’이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명절과 제삿날이면 우리 집은 삼촌들과 고모네

식구들로 북적거렸다.

 

그래서 제삿날이되면 나는 오랜만에 보는 사촌들과

갓 튀겨 바삭하고 맛있는 튀김과 전들을 집어

먹으며 신나게 놀았다.

 

만들고 있는 음식들을 날름날름 집어 먹으며

사촌들과 재밌게 놀면서도 내가 가장 기다리는 건

따로 있었다.


나는 제사가 끝나고 먹는 저녁상을 가장 기다렸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음식에 마음껏 손을 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제사 전부터 이미 만들고 있는 음식을

날름날름 집어먹었다는 사람이,

이 무슨 논리적이지 않는 망발을 하는 거냐면.


어릴 때 만화 영화를 보면서

꼭 따라 하고 싶은 장면이 있었는데,

그걸 해보기 위해선 반드시 제사가 끝난

이후여야 했다.


바로 '산적대왕의 식사'다.

뼈에 붙은 통고기를 우걱우걱 뜯어먹으며

한상 떡하니 차려진 상에서 이것저것 산적 대왕처럼

집어먹는 장면을 본 날, 어린 나의 머릿속에

이건 꼭! 반드시! 해봐야 하는 일로 각인되었다.


이 장면을 원작에 가장 가깝게 흉내 낼 수 있는 날이

바로 제삿날이었다.

지역마다 특색이 있겠지만 우리 집 제사상에는

항상 '닭 통구이'가 올라갔다.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에 꼭 필요한 메인 메뉴다.


그 외에도 '돼지고기 통수육'과 '쥐포튀김'(이거

진짜 맛있다. 넓고 긴 쥐포 뭉탱이를 손가락 두 개

정도의 너비와 길이로 자른 뒤 튀기는 건데

사촌들과 이것만 집어먹다 거의 쫓겨날 뻔한 적도

있다.), ‘무시찌짐’(통무를 동그란 모양 그대로

적당한 두께로 썰어 부치는 전인데, 예전부터

아빠는 이 무시찌짐을 매우 좋아하셨고

나는 어른이 되어 환장하게 된 음식 중에 하나다),

그 외에도 ‘생선찜’, ‘문어찜’. 그야말로 산해진미다.


제사가 끝나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상이

내어져 오면, 내 손이 가장 먼저 가는 음식은

당연히 '닭 통구이'다. 이건 가끔 엄마가 시켜주시는

양념치킨이나 후라이드치킨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이다.

특히, 제사상에 올리는 닭이라 가장 큰 놈으로

만들었기에 어린 나의 눈에는 거의 칠면조를

대하는 것 만큼 거대한 느낌이었다.

 

한 손으로 '닭 통구이'의 몸통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한쪽 다리를 잡고 ‘부욱’ 찢는다.

'부욱'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 나의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잡는 부위가 애매하거나 힘 조절을 잘못하면

앙상하게 남은 다리뼈만 쑤욱 빠져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넓적한 윗부분은 그대로 남기고

닭다리 봉만 손에 잡히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은 실패다.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통다리 들고 뜯기'를 못한다는 건,

그 뒤에 아무리 다른 음식들을 산적대왕처럼

먹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굉장히 신중하게 이 닭다리 뜯기 작업에

들어간다.


너무 아래를 잡아서도 안되고,

순간적으로 너무 센 힘을 줘서도 안된다.

'부욱'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의 힘 조절과

넓적한 통살이 딸려올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잡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통다리가 부욱하고 찢어지면

이제 이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은 거의 90% 이상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다.

넓적한 다리살이 붙은 거대한 통다리를

의기양양하게 입으로 가져간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와악' 하고 한입 가득 물어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렇지! 이제 척하면 척이다.

닭다리를 몸통에서 뜯어 낼 때 '부욱'이 중요했듯이,

이 단계에선 '와악'이 중요하다.


벌릴 수 있는 최대치로 입을 벌리고,

벌린 입안 가득 통다리의 넓적한 살 부분을

밀어 놓고 입을 닫는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귓가에 '와악' 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올 정도로 입을 벌렸다 다물어야 한다.

 

다른 식구들처럼 자리에 앉아 같이 식사는 못하시고

계속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는 엄마가 이 모습을

본다. 식혜가 담긴 컵을 나르고, 수육과 함께 먹을

김치를 썰고, 상 위를 주시하며 떨어져 가는

음식들을 더 담아내오느라 정신없는 엄마가

나의 이 모습을 보고 '어마 쟈봐라' 하면서

웃는 모습이 나오면 의식은 대성공이다.

이제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된다.


쥐포튀김도 입에 넣고, 오징어튀김도 새우튀김도

입으로 마구 집어넣는다. 튀김 반 개도 더 들어갈

자리가 없도록 양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넣고

‘와구와구’ 씹어 삼킨다.


옳지!

이 단계에서는 '와구와구'가 가장 중요하다.

역시 '聞一知十'의 똑똑한 '일.와.스' 독자답다.

(24화 제목의 '풍림화산' 한자를 맞추시고 기쁨의 댓글로 알려주신 'Jihyun Kim'님, 다음 레벨의 문제입니다.)


'일.와.스'?  '일.와.스'!! 

어디서 은근슬쩍 유명한 것처럼 줄여쓰냐고?

뭐 앞으로 유명해질 거니까 괜찮다.

유명해지고 줄여 쓰나,

줄여 쓰고 나중에 유명해지나.

엎어치나 메치나.


아니 나중에 안유명해질 수도 있지 않냐고?

뭐 그럼 그건 독자제위께서 열심히 주변에

'일와스'를 전파 안 해주셔서 그런 걸로

변명 삼으면 될..

(벌써부터 안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해요 우리.)

 

각설하고,

이다음엔 들고 있던 통다리를 산적대왕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번씩 뜯어먹으면서,

그때그때 눈이 가고 손이 가는 음식들을 곁들여

먹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배가 남산만큼

불러오는데, 그쯤 되면 이제 맞은편에 아빠가

식사하시는 걸 구경한다.


아빠는 식사를 굉장히 천천히 하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많은 단계를 거치며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을 진행하더라도 의식이 끝나고 아빠의

밥그릇을 보면 반 이상이 남아있다. 언제나.


반 이상 남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아빠를 좀 더 관찰한다.

역시나 제일 좋아하시는 ‘무시찌짐’ 접시를 앞에

두고 세상 제일의 진미를 드시는 듯 맛있게

식사를 하고 계신다.

나도 싫어하진 않아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 중에

한두 개 집어 먹긴 하지만, 아직 어린 나에게 간도

심심한 이 ‘무시찌짐’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음식이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산적대왕의 식사’의식이

끝나면, 사촌들과 내방으로 올라가 귀신놀이도 하고

'인생럭키게임'이나 '부루마블' 같은

우애가 박살나는 돈독해지는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고,

서울에서 직장에 들어가고,

서울에서 결혼을 하면서,


나는, 그리고 내가 꾸린 내 가정은 제사에 불참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야근을 하느라, 애가 어려서, 애가 아파서,

내가 아파서, 쉬고 싶어서, 그냥 가기 귀찮아서.

 

살갑게 지내던 삼촌, 고모들과도 지역이 달라지며

언젠가부터 아빠,엄마 두 분이서만 제사를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나의 참석, 불참석이 반복되며

근근이 이어져 오던 우리 집 제사는, 몇 년전

부모님과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공식적으로 그 장대한 막을 내렸다.


설날과 추석엔 각자 여행을 가거나 가족들이 모여

맛있는 걸 사 먹는 것으로 정리했고,

몇 년간 그렇게 지내고 있다.


물론 아직 할아버지 기일이 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을 위한 상을 차리시고

아빠, 엄마 두 분이서만 간단히 제사를 지낸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아직 옛날 사람인 두 분에게 완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건 무리이리라.


내가 왜 우리 집은 제사를 거의 지내지 않는다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시는지.


그리고 어린 날 '산적대왕의 식사' 의식의 영향인지

나는 유독 통다리에 집착한다.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마트에 통다리구이가 보이면

덥썩 손부터 가서 집어든다.

그런 거 맛없을 텐데라고 같이 사는 분의

간접적인 만류에도  넓적한 통다리 구이는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산적대왕을 유혹하고, 산적대왕은 거의 항상

그 유혹에 넘어간다.

 

그래서 한밤중 혼자만의 와인 만찬을 준비할 때

함께 페어링 하는 음식으로 넓적 통다리 구이가

선택될 때가 꽤 있다. 진한 까베르네소비뇽에도,

연한 피노누아에도. 산뜻한 소비뇽블랑에도,

부드러운 샤도네이에도.

모든 품종에 다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산적대왕

전용 메뉴다.

 

글을 쓰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있으니,

다시 넓적한 통다리 구이가 먹고 싶어 진다.


그래. 오늘밤, 만찬을 준비하자!

마침 어제 바나나를 사러 갔다 9,900원 세일하길래

사놓은(늘 이런 식이다.) 라크라사드가 딱이다.

 

자, 이제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자

빨리 밤이 와라!

어서 모두 잠들어라!



*사실 이번 화를 쓰면서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넓적한 닭다리 통구이만이 아니었습니다.

‘닭다리 통구이’만큼이나 절 괴롭게 했던 건

'무시찌짐'이었습니다.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이제 누가 보더라도

감쪽같이 ‘교양있는 현대의 서울 사람’이 된 저는

'무 전'이라 바꿀 수도 있지만,

왠지 이 음식은 '무시찌짐'이라는 이름에서

한 글자도 바꾸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슴슴한 맛의 '무시찌짐'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생각이 나고 맛있어집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특히, 와인안주로.

더 특히 레드와인 안주로 너무 좋습니다.

모든 레드 와인들에 최강의 스폰서가 되어줍니다.

어떤 레드 와인일지라도 각자의 맛과 향을 최대치로

느끼게 해주는 극강의 와인 페어링 메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해 먹으면 그 맛이 안 나서 이제는 아주 가끔

본가에 갔을 때, 엄마가 해주시는 경우에만

먹을 수 있는 소중한 '무시찌짐'입니다.


이런 음식들이 다들 하나쯤은 있으시겠죠?

공유해 주시면 모두의 와인 생활이 보다

풍요로워질 것 같습니다.

공유해도 될만한 음식인가 주저하지 마세요.

어떤 음식이라도 와인은 페어링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생활을 기원드리며,

이만 총총.



*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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