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나는 누워있는 걸 좋아한다.
내 와식 사랑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시절.
몸은 바닥에, 발은 소파에 올려 두고
마치 서커스단원이 물구나무를 서듯
기이한 자세로 책을 읽곤 했다.
그 자세로 책을 읽고 있으면
빨래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던,
구멍이 난 양말을 꿰매고 있던,
마른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있던,
식사준비가 다되어 식구들을 부르러 나오던,
각양각색의 엄마가 한 마디를 휙 던지고 지나간다.
”그래가지고 글자가 눈에 들어오나!“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더욱 청개구리가 된다.
보다 기묘한 동작으로 자세를 업그레이드시켜
끝내 엄마의 입에서 ‘하이고’ 하는 탄식을 끌어낸다.
그리고 혼자 씨익,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밥을 먹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초스피드로
소파와 몸을 일체화시킨다.
등과 소파에 초강력 자석이 붙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순식간이다.
한쪽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3인용 소파에 다리를
쭈욱 펴고 있으면 그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이 매우 만족스러운 자세로 책을 읽고 있으면
어김없이 엄마의 한 마디가 들려온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잉 빨리 인나!“
그럼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소파 등받이 쪽으로
몸을 슬며시 돌아 눕는다. 이 자세로 계속 책을 읽고
있으면 정말 스릴이 넘친다.
셋, 둘, 하나.
어라? 아직인가?
다시.
셋, 둘, 하나.
오늘은 좀 많이 늦네?
다시.
셋, 둘,
짝!
으헉. 깜짝이야!
돌아 누운 등에서 엄마의 화끈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렇게 기어이 엄마의 사랑을 흠씬 느끼고서야
작은 몸을 소파에서 일으킨다.
상체는 팔을 등뒤로 어루만지는 자세로 비비 꼬며,
얼굴엔 실없는 웃음을 실실거리며.
읽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3층 다락방으로 걸어가고 있노라면
엄마의 다음 대사가 이어진다.
“또 방에 가서 누워서 봐라이!”
‘누워서 보라’는 말이 ‘누워서 보지 말라’는 말의
최상급 강조 표현임을 아주 잘 알면서도,
굳이 이번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개구리가 되어
굳이 글자 그대로 행동한다.
3층 다락방에 도착한 순간 바로 배부터 방바닥에
붙인다. 아래층에서 한마디가 더 들려온다.
“눈 나빠진다! 일나서 봐라!”
그렇게 한참을 책을 보고 있으면,
밥 먹으러 내려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일단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보던 책에 집중한다.
처음 보다 조금 더 하이톤으로 한번 더 들려온다.
이때는 보던 페이지까지만 읽고 내려가기로 한다.
드디어 마지막,
최후통첩이 날아온다.
”엄마 올라갈까?“
이 단계에서 늘 궁금했던 건
‘응’이라고 대답하면 엄마가 올라올까.
‘아니’라고 대답하면 엄마는 안 올라올까.
이제 최후통첩까지 들었다면,
바로 책을 덮는 게 여러모로 좋다.
정신 건강에도, 등짝 건강에도.
자,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가보자.
애벌레가 나뭇가지를 기어가듯,
굼벵이가 바닥을 구르듯,
배를 바닥에 깐 자세로 엎드려
세상 힘겹게 바닥을 기어간다.
엎드려 기어가는 게 힘들면
발라당 돌아누워 등을 바닥에 대고
양어깨와 양 발에 힘을 준다.
이번엔 철조망을 통과하는 군인이 된다.
그렇게 바닥 먼지를 다 쓸며 바닥을 기어가다 보면
다락방에서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초입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발과 다리를 계단 아래로 축 늘어뜨린다.
거의 누운 자세 그대로 눈썰매를 타듯
엉덩이로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통, 통, 통
엉덩이에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오지만,
통증보단 재미가 우선이다.
그렇게 아래층 기준으로 다시 계단 초입에 도착하면
역시나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등짝으로 엄마의 화끈한 사랑이 느껴진다.
엄마의 사랑이 식을세라 팔을 등뒤로 꺾으며
주방 식탁으로 후다닥 뛰어가보면...
"엄마!! 밥을 차려 놓고 부르라고!!"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국 간을 보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에서
소파 등받이로 돌아 눕던 내 모습이,
배를 깔고 방바닥에 누워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역시,
엄마는 고수다.
* 와인 이야기
: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누워 있는 걸 가장 좋아하던
저 어린이는, 결국 커서 와인(臥人)이 됩니다.
와인(臥人)이 되어 와인을 가장 즐겨 마시게 됩니다.
와인(臥人)에게 한 마디씩 대사를 들려주는 사람만,
다른 두 여자로 바뀌었을 뿐.
아마도,
와인(臥人)의 와인 사랑은 필연이었나 봅니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스토리,
읽고 나니 이게 와인 이야긴지..
뭔가 사기당한 느낌적 느낌을 읽는이들에게
한가득 안겨주며 시즌3 제27화, 끝.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 생활을 기원하며,
그럼 이만 총총 후다닥!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