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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Feb 06. 2024

와인과 어른 왕자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3

"…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여우와의 대화 中




제9화. 와인과 어른 왕자


"이를테면, 갑작스레 내일 와인 약속이 잡힌다면

난 연락을 받은 직후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잠 들 시간이 되면 흥분해서 잠도 잘 못 잘 거야.

그래서 내일이 되면 행복이 이런 것인가 알게 되겠지!"


갑작스레 잡히는 약속을 좋아한다.

너무 오래전부터 잡히는 약속은 현실감이 없다.

그건 마치 한 달 뒤 추첨하는 로또를,

한 달 전 미리 사놓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들을 참 좋아한다.


갑작스레 내리는 비도 좋아하고,

갑작스레 내리는 눈도 좋아한다.


갑작스레 마주친 예전 직장 동료도 좋고,

갑작스레 걸려 오는 오랜 친구와의 통화도 좋다.


갑작스레 동네 친구와 동네 커피집으로 떠나는

커피 한 잔의 여행도 좋고,

갑작스레 가족들과 제주도로 대만으로, 싱가포르로 베트남으로 떠나는 서프라이즈 여행도 좋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갑작스레 잡히는 와인 약속이다.


시간이 멈춘 듯 빈틈없이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는

유유자적 광합성을 하는 우리 집 치자나무처럼

머리부터 얼굴, 두 손, 상반신을 지나

바지 사이로 드러난 발목까지.

온몸 그득 햇살 샤워를 하며 한 잔 하는 행복이 있고


후두두둑 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그런 날에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비 오는 파리 골목을 떠올리거나,

'레이니데이 인 뉴욕'의 습도 100% 소호거리와

센트럴파크를 떠올리며 비의 감성에 영화의 감성을

보너스로 얹어 한 잔의 행복을 두 배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낮과 밤

맑은 날과 흐린 날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그 어떤 날이라도 그날에 딱 적당한 와인이 있다.

특정 와인 라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 마시게 되는 그 와인이 바로

그날에 딱 적당한 와인이다.


상쾌한 소비뇽블랑을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마셔도 좋고,

부드러운 샤르도네를 사방이 어두 칙칙 먹구름 잔뜩

흐린 날 마셔도 마냥 좋다.


실바람 살랑이고 나뭇잎 싱그러운 어느 환한 봄날

타닌 가득 아르헨티나 말벡을 마셔도 좋고,


걸어오는 동안 신발엔 비가 들어와 질퍽하고

바지 밑단과 셔츠는 비에 젖어 엉망인 채로.

약속한 가게를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해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핸드페이퍼로 닦아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먼저 온 친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의자에 털썩 소리 내어 앉아.

오크향 가득한 미국 까베르네소비뇽을 마셔도

너무 좋다.


어떤 날, 어떤 날씨라도

좋은 이들과 함께 마시는 와인이라면

안 좋은 날이란 게, 안 맞는 와인이란 게 내겐 없다.

그 어떤 날이라도, 그 어떤 와인이라도 좋다.


가끔 주종이 와인이라고 하면 좋아하는 품종이나

좋아하는 와인 이름을 질문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좀 난감하다.


다른 이들처럼 좀 세련되게,

'아 저는 이 품종이 이러이러해서 참 좋아합니다.'

라고도 말하고 싶고,


다른 이들처럼 좀 여유롭게,

'땡땡나라 땡땡지역 와인 드셔보셨어요?

거기 와인이 저러저러해서 참 매력적이에요.'

라고도 말하고 싶으며,


다른 이들처럼 좀 멋있게,

'특히 땡땡 년, 땡땡 년은 포도 작황이 너무 좋아서

그 해 빈티지는 정말 최고죠.'

라고도 말하고 싶지만.


그냥 와인이라는 종 자체를 좋아하는 나는

한참 난감한 표정을 짓다 코도 한 번 슬쩍 만지고

코 밑도 검지 손가락으로 한 번 스윽 문지른 다음

괜히 혀도 한 번 내밀었다가

'아... 특별히 좋아하는 건 따로 없고 그냥 와인이면

저는 다 좋아요.'

라고 느릿하게 말하고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동네 바보형처럼 실실 웃는다.


뭐, 어쩌랴.

전 세계에 포도 품종만 2천 종이 훌쩍 넘고,

그중에서 와인을 만드는 품종만 2백 종가량이

된다는데 나는 그것들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배울 계획도 물론 없다.


너무 늦지 않은 어느 미래에

내가 로또라도 되어서 돈과 시간과 열정이

삼위일체가 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 심각하게 한 번

고민해 볼지도 모르겠다.

... 뭐, 그럴 일 없다는 소리를 조금 길게 써봤다.


시즌1의 1화부터 지금 쓰고 있는 이번 화까지

내가 일상와인스토리를 쓰는 이유가

매화에 조금씩이나마 녹아들어 있다.


나는 와인의 진입장벽이 훨씬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참이슬 한 병이요', '처음처럼 한 병이요'처럼

어디서든 ‘와인 한 병이요’를 외칠 수 있으면 좋겠다.


가게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모 여기 오백 세 잔이요!'를 숨 쉬듯 자연스레

외치는 것처럼

'이모 여기 와인 세 잔이요!' 하며 하우스 와인을

아무렇지 않게 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  


식당마다 1~2만 원대의 와인리스트가 메뉴판 한쪽

면을 일렬종대로 가득 채우고 있으면 좋겠다.

가벼운 나의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그날의 와인을 고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지도록.


... 뭐, 더 싸고 편하게 마시고 싶다는 소리를

조금 많이 길게 써봤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와인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편하게  

접할 수 있게되면 더더 좋겠다.

그리고 그런때가 되면 갑작스레 잡히는 와인 약속이

지금보다 두 배쯤 더 많아지면 더더더 좋겠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3,

제9화, 끝.


* 사람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와인을 마셨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도무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와인의 느낌은 어떠니?

그 와인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셨니?"

절대로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어느 나라 와인이지? 와이너리는? 빈티지는?

그 와인 얼마짜리니? “

항상 이렇게 묻는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는 아주 아름다운 통창이 달린 가게를 보았어요.

그날 비가 많이 내렸고, 통창 바깥 위쪽에 설치된

어닝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음악소리처럼..."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날의 그 와인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겐 "나는 십만 원짜리 와인을 마셨어요."

라고 말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소릴 친다.

"얼마나 맛있었을까!"       

- 박나비, '어른 왕자'.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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