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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Feb 13. 2024

설날, 그 잔인함에 관하여

'올라가?'

'말아?'


'그래도 한 번 올라는 가볼까?'

'굳이 올라가 볼 필요가 있을까?'


올라갈지, 말지.

단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무한 반복 중이다.

38번째쯤에서 내적갈등이 절정에 이른다.


'아니 확인은 한 번 해야 되지 않을까?'

'굳이 자진해서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 올라가지 말자.'


노트북과 충전기를 담은 가방을 둘러메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결정을 내렸지만, 괜스레 마음이 찝찝하다.


일부러 팔에 힘을 주어 앞뒤로 크게 흔들며

씩씩한 척도 해보고

허벅지와 종아리, 발바닥에 힘을 주어 축지법도

시도해 보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큰일이다.

명절 때마다 이 모양이니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스토리,

도대체 무슨 고민인지, 서두를 읽어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당신을 잡아끌며

시즌3, 제10화 시작.




제10화. 설날, 그 잔인함에 관하여


2024년 푸른 용의 해,

'설날 맞이 양가 방문 일정'은 심플했다.

금요일 새벽 본가로 출발해서

일요일 오전 복귀.

다시 일요일 오후 처가로 출발해서

월요일 오후 복귀하는 아름다운 일정이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일정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우리 가족은 웃음과 정이 가득한 설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일정을 수행하며 얻은 심각한 부작용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금토일월, 4일간의 설 연휴는 내게 너무 잔인했다.

연휴가 끝난 화요일 오전,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로 간 나는 거울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게 내 얼굴이라고?'

'연휴 전 보다 두 배는 커진 것 같은데?'

'자는 동안 누가 얼굴을 돈가스 망치로 두드려 폈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번에는 샤워를 하려

옷을 벗었다. 곧, 두 번째 경악이 찾아왔고,

두 번째 현실 부정이 시작되었다.


'이게... 내 배라고?'

'옆구리에 매달린 얘네들은 뭐지?'

'너네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거울이 불량인가?'

'그렇지! 거울이 문제임이 분명해! 이럴 리가 없지.'

  

계획에 없던 체중과 체형의 급격한 변화를 확인하고

두 번의 현실부정 타임이 찾아오자

뇌가 사고 회로에 전력 공급을 일시 차단하는

신기로움을 경험한다.


화장실에 들어온 목적도 잊고 무릎을 감싸 안은채

샤워부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한참을 고장 난 로봇처럼 쭈그려있으니 다리가

저려온다. 무의식 중에도 코에 침을 바르고 있다.


샤워를 어떻게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 거대한 얼굴을 씻는 게 의미가 있나.

이 비루한 몸뚱이를 닦아서 무엇한단 말인가.


그저,

넓디넓은 잔디밭에서 제초기를 돌리는 느낌으로

얼굴을 뒤덮고 있는 수염을 잘라냈고,

거대한 코끼리의 몸을 닦는 느낌으로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몸을 닦아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체중계가 있는 방으로

향하려다 멈칫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내가

슬며시 나에게 말을 건넨다.


'감당할 자신 있나?'


흠칫 놀라며 마음속 나에게 답한다.


'... 그런 자신이 있을 리가...'


다시 마음속 내가 말한다.


'그럼, 발길을 돌려.'


다시 내가 답한다.


'그래도... 상황은 파악해야 되지 않을까?'


마음속 내가 비웃는다.


'거울을 보고도 상황 파악이 안돼?'


... 답할 말이 없다.


이렇게 마음속 나와 잔인한 대화가 끝나고

침묵 속에서 수십 번의 고민을 더 해보았지만,


끝내 올라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결국 힘없이 발길을 다시 돌렸다.

얼른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처참한 기분이다.



카페에 앉아 4일간의 연휴를 복기해 본다.


장시간 운전에 대비해서 준비한

김밥과 삶은 계란, 커피와 음료, 그리고 각종 간식들.

... 클리어.


본가에서 '파티다!'를 외치며 준비한

광어회와 연어회, 족발과 양념게장, 샌드위치와 주전부리들.

엄마표 LA갈비와 무시지짐, 고구마튀김과 연근 튀김, 떡국과 식혜.

... 클리어.


서울로 올라와 들른 처갓집에서

장모님표 갈비찜과 양념게장, 문어숙회와 수육,

대구전과 부추전, 나물 비빔밥과 떡만둣국.

... 클리어.


정말이지 화려한 라인업... 아, 이게 끝이 아니다.

'양가 순회 먹방'을 마치고 돌아온 어젯밤.

설날 연휴 대장정의 대미를 장식한

마트표 만다린 오렌지 치킨.

... 클리어.       


그리고 이 모든 음식들과 함께한,

본가에서 스파클링 와인 한 병과 레드 와인 두 병.

처가에서 예산사과와인 한 병과 장인어른이 하사하신 산삼주 한 잔.

집으로 돌아와 연휴의 마무리를 장식한 레드 와인 한 병.


후아... 복기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사람새낀가... 

4일 전의 나는 스모 선수가 꿈이었을까.


충격에 빠져 글을 쓰다 말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손목이 저려온다.

두 배로 커진 얼굴을 바치느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가냘픈 손목의 울부짖음이리라.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가 지잉 거린다.

앉아 있은지 한 시간이 되었다고 일어나라는 신호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다 주저앉을 뻔했다.

흥부네 지붕에 주렁주렁 열린 박처럼

배와 옆구리에 주렁주렁 달린 새로 사귄 친구들을

보고 놀란 척추의 비명이 들려온다.


하아... 그러니 작작 좀 먹고 마셨어야지...

힘겹게 일어나 살기 위해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다음번 명절에는 절대 이러진 말자고.


하지만 늘 그렇듯,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추석에 두고 볼 일이다.



* 나흘간의 설날 연휴는 가족들과 반가운 시간을

담보로 제 배와 옆구리에 주렁주렁 새 친구들을

대출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 대출을 어떻게 상환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10년 거치, 30년 상환은 좀… 그렇겠죠?  

물론, 저도 마음만은 당장 일시불 상환이지만

‘요요’라는 무시무시한 중도상환수수료가 마음에

걸리네요.


* 와인 이야기

명절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와인 한 종 소개드립니다.

'도멘 생 미셸, 브뤼

(Domaine Ste. Michelle, Brut)'

미국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물론 비싼 샴페인도 좋지만, 오래오래 지속 가능한,

그래서 행복하고 즐거운 와인생활을 모토로 하는

일상와인스토리라는 점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워싱턴주에 위치한 '콜롬비아 밸리'지역 와인으로

할인가 만원 중후반대, 상시가 2만 원 초반대로

가성비 좋은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성실한 일상와인스토리의 독자시라면

샴페인과 스파클링 와인의 차이점은 이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라고요? 괜찮습니다.

시즌1, 7화를 다시 한번 복습하시면 됩니다.


이름 끝 '브뤼'를 보시면 생각나는 게 있으시죠?

없다고요? 괜찮습니다.

시즌2, 2화를 다시 한번 복습하시면 됩니다.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자체 기준과 방식으로

제조한 스파클링 와인들에만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기에 '도멘 생 미셸, 브뤼'는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하지만 와이너리를 설명한 글을 보시면

제가 이 와인을 추천드리는 이유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 도멘 생 미셸 브뤼는 워싱턴주의 콜롬비아 밸리에서 생산된 프리미엄 포도로 제조되었다. 이는 프랑스의 유명한 샴페인 지구와 비슷한 북쪽 위도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포도가 성장하는 시즌 동안 일조 시간이 약 2시간 더 길어지기 때문에 더욱 풍부하고 향과 농축된 포도의 맛을 자랑한다. 낮 동안의 충분한 햇빛과 시원한 저녁은 풍부한 향과 상쾌한 산도를 가진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 출처: 와인21


샴페인이라는 이름은 사용할 수 없지만

프랑스 상파뉴 지역과 비슷한 환경의 와이너리에서

생산하기에 매우 만족스러운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브뤼기에 당도는 낮지만 오픈과 동시에

상쾌한 사과향을 직관적으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스파클링 와인들에서 종종 느껴지는

씁쓸한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와인을 처음 드시는 분들도 부담 없이

맛있게 드실 수 있는 가성비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아, 탄산은 조금 센 편입니다.


퐁~하는 코르크 마개 오픈하는 소리가

기분 좋은 자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쏴아~하는 거품과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가

입맛을 더욱 돋웁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자리에

이 와인 '도멘 생 미셸, 브뤼'를 추천드립니다.


* 어느덧 시즌3의 마지막 10화입니다.

시즌1부터 함께 달려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화로 처음 일상와인스토리를 접하신

분들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드립니다.


일상와인스토리 한 편의 글이,

한 번이라도 당신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드렸다면.

한 분이라도 와인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부디 그랬기를 바라봅니다.


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생활을 기원드리며,

그럼 이만.


- 일상와인스토리 시즌3 完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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