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육아'의 함정
나는 정리정돈을 못한다. 퇴근할 때에도 읽고 있던 책, 검토하던 원고, 쓰고 있던 노트를 그대로 펼쳐놓고 퇴근하는데 이유는 한 가지다. 그래야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어제 하던 일을 바로 이어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물건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에 그 물건을 다시 찾지 못한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건 물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데, 불과 1평 남짓의 책상 공간에서도 물건을 못찾기는 마찬가지여서 만일 세 번째 서랍에 뭐가 있는지를 떠올리려면 세 번째 서랍을 열어봐야지만 알 수 있다. 유추해보건데, 나는 무언가를 효율적으로 찾기 위해 정리하는 행위와 시간마저도 비효율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눈에 보이게 두면 굳이 정리를 할 필요가 없는데, 무엇하러 정리를 하느라 시간을 버리는가? 그러느라 모든 물건이 다 눈에 보이게 널부러져 있다.
다행인 것은 남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집이 항상 더럽다는 점에 있어서는 불행이지만, 그것 때문에 굳이 싸울 일이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신혼 초 앞쪽을 눌러 써서 뒤에서부터 한참을 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치약을 보고 끝에서부터 짜야 굳이 쓸 때마다 몇 번씩 밀어야 하는 불편이 없다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자 남편이 점잖게 대꾸한 적이 있다. 여보, 우리 이런 걸로 싸우기 시작하면 평생 싸워야 해요. 우리 사소한 것들은 사소한 채로 넘어갑시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웃겨서 이후 실제로 사소한 일은 사소하게 넘어가게 되었다. 집이 좀 더러운 것으로 문제제기 하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오복과도 같은 큰 복이다.
다만, 두 마리의 아이들이 태어나 기하급수적으로 장난감이 늘어난 곳에서 정리정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를 의미했다. 이건 단순히 몇 개 물건이 늘어선 수준이 아니라 강박적 무질서에 가까웠는데, 모양새만 보면 장난감을 한데 모아 목적성을 가지고 흩뿌려야만 나올 수 있는 수준의 어지러움이었다. 이게 어디 비단 우리 집뿐만의 일이겠는가. 아이들은 딱히 그러려는 의도가 없는 채로 부모의 머리뚜껑을 열리게 하는 일들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진정 사악하다고 볼 수 있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근거 역시도 ‘애들을 봐라, 얼마나 못돼 처먹었냐’이지 않은가 ㅋㅋ
실제로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엄마 모임엘 나가 보면 시도때도 없이 집안을 어지르는 애들 때문에 하루종일 스트레스 받는다고 호소하는 엄마들이 적지 않다. 나에게도 회사 다니면서 언제 집을 치우는지를 묻는 엄마들이 많고 내가 ‘나는 그냥 안 치운다’라고 대답을 하면 애들이 집을 어지럽히지 않는지를 반문한다. 왜 안 어지럽히겠는가. 증거자료로 제시한 저 수준으로 매일매일, 1년 365일 온 집안이 엉망진창이다. 나는 어느 때엔 치우고 어느 때엔 치우지 않는다. 치우는 때와 안 치우는 때의 기준은 한 가지다. 짜증내면서 치울 것 같으면 안 치우고, 기분 좋게 치울 것 같으면 치운다. 다시 말해, 청소를 하더라도 애들한테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서는 청소를 하고, 청소하다 애들을 쥐잡듯이 잡을 것 같으면 차라리 더러워서 신경이 거슬리는 정도의 상태를 유지한다.
아이들에게 있어 물건을 마구 흩트러뜨리는 과정 자체는 주변에 대한 탐색이자 호기심을 충족해나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주의집중시간이 짧고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상태에서는, 이거 만지다가 저거 만지고 저거 만지다가 저건 또 뭔지 관찰하면서, 자신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탐색하게 된다. 그 많은 과정을 겪은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재밌고 신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 차례씩 애들 쫓아다니며 여기 치우고 저기 치워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얌전히 인형이나 로봇을 가지고 놀다가 '이제 싫증이 났으니 다른 걸 가지고 놀아 볼까?' 생각이 드는 때에 먼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원래 있던 장소에 잘 두고 새로운 장난감을 꺼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놀이로 인해 잔뜩 자극되었던 창의적 연속성은 중단되고 만다.
애들 창의력을 키우겠다고 일부러 오만 학원을 다 보내는 시대에, 엄마도 편하고 아이에게도 유익한 생활 패턴이 있다면 안 지키는 것보단 지키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청소가 그렇다. 우리 집 애들은 청소할 때마다 "이~게 집이야, 돼지우리야!" 소리지르는 엄마를 보지 않아도 된다. 대신 몇 개 필수조항이 있다.
1. 엄마는 대신 치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본인이 불편을 느낄 때 치워야 하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다.
2.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는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한다. 한 번 해봤을 때 좋은 놀이를 다시 하기 위해서 그 놀잇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다.
아이가 굳이 불편하지 않다면, 반드시 사방이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놀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면, 아이 주변에 오만 게 좀 모여 있다고 한들 뭐가 대수이겠는가. 문제는 부모다. 그 혼돈과 무질서를 견뎌낼 수 있는가. 정리정돈은 좋은 습관이지만, 정리정돈이 강박이 되는 것은 절대 아이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가벼운 수준의 혼돈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자극을 찾는 활로가 된다. 좀 어지러워야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전에 못 놀아본 방식으로 놀게 되며, 그걸 통해 어떻게 놀아야 재미있는지를 스스로 찾을 줄 아는 응용력이 생기게 되면, 그게 바로,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바라고 마지 않는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우리 집은 아이 눈높이의 수납장으로 한쪽 벽면을 채우고 수납장 칸막이마다 인형, 레고, 퍼즐 등으로 카테고리를 분류해 칸막이 표면에 각 아이템의 이름과 그림을 그려둔 뒤 놀고 싶은 장난감을 알아서 꺼내어 놀도록 하고 있다. 다시 그 자리에 넣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인데 물론, 제대로 분류된 장난감은 하나도 없다. 그 와중에도 놀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귀신같이 꺼내서 놀다가는 꺼냈던 곳에 (열 번 중에 한두 번 꼴로) 집어넣어둔다.
나와 남편도 마찬가지다. 딱히 정리정돈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규칙적으로 지켜지는 패턴이 존재하는데, 다름아닌 카테고리의 법칙이다. 누구도 제대로 정리정돈을 하진 않지만 우리 집에선 이상하게도 모든 물건이 그 물건이 있어야 할 곳 언저리에 있다. 말하자면, '이 수납장은 상비약들이 들어있는 수납장이다'라고 일단 정해놓으면 비록 그 안에서는 온갖 약품들이 아비규환을 하고 있을지라도 일단 우리 집안의 모든 상비약은 그 수납장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애들은 자기 옷이 어디 있는지를 찾을 때 마지막칸은 첫째의 하의 두 번째 칸은 둘째의 상의와 같은 식으로 폴더를 연다. 그럼 그 안에 이렇게 구겨지고 저렇게 구겨진 옷가지들이 그러나 정확하게 첫째의 하의이고 둘째의 상의인 옷들이 까꿍하고 제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에 다시 찾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걸로 애를 혼내기 시작하면, 아이는 뭘 꺼내어 놀 때마다 다시 치울 것이 번거로워 놀고 싶은 만큼 놀기 어렵게 된다. 잘 노는 아이와 정리정돈을 잘하는 아이 중에 어떤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는가. 정리정돈은 크고 난 뒤에 학습으로도 습득할 수 있지만 잘 노는 동안에 습득한 기쁨의 효과는 나중에 아이가 다 크고 난 뒤에 주입하려 해도 주입할 수가 없다.
카톨릭의대 소아청소년과 김영훈 교수의 조언에 따르면 애가 정리정돈을 못한다고 해서 아이가 놀고 있는 중에 놀잇감을 바로바로 치우게 되면 아이의 마음은 불안해진다고 한다. 아이가 어지럽힌 공간을 보고 너무나 괴로운 마음이 든다면, 아이의 놀이가 끝나 보이는 즈음에 '모두 모두 제자리' 노래를 불러보자. 정리가 놀이가 되기 시작하면 애도 엄마도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된다. 잘 놀았으면 됐다. 이게 기준이 되면, 아이의 놀이는 부모에게도 기쁨이 된다. 정리정돈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아이의 기쁨을 우선으로 두게 되면 엄마의 바디 앤 소울에도 행복이 찾아온다. 좀 즐겁게 애를 키우자. 정리조차도 놀이가 된다면, 엄마는 아무때고 최고의 친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