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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늘 Jan 15. 2020

나는 왜 후배에게 존댓말로 인사했는가

꿈을 이루지 못한 자의 비애


이것은 아주 슬픈 이야기다. 비루하기도 할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부족함과 찌질함이 흡사 정교한 세밀화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날 이야기로, 나는 슬프지만 당신들은 우스울 것이다.


나의 꿈은 소설가다. 꿈이 소설가여서, 대학 문을 나선 이후 하루도, 정말 하루도, 슬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에게는 다정한 남편이 있고,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는 두 아이가 있고, 탄탄한 일자리도 있(었)고, 이사 갈 걱정 없는 집도 있으나 이른 아침 씻으려고 샤워실 물줄기 아래에 서 있으면, 헐벗은 내 몸 위로 '오늘도 나는 소설가가 아니구나' 하는 슬픔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곤 했다. 과장 같지만 진짜다. 대학 시절 나는 학과에 딸린 문학연구자료실에 해질 때 들어가 해 뜰 때 나오면서 글 쓰는 일에 매달렸다. 술자리에 불려 나가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다시 문학연구자료실에 들어가 국어대사전 위에 머리를 뉘어야 마음이 편한 날들이었다. 침으로 흠뻑 젖은 낡고 쭈글한 사전을 쳐다보면서, 어쩐지 이 일도 어느 유망한 소설가의 치기 어린 기억이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스스로 뿌듯했던(ㅋ) 그런 반푼이 같던 날들이었다.

졸업하면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면서 방세와 밥값만 벌고 나면 남은 시간은 모조리 글 쓸 거라고 떠들던 나는, 동기 중에 가장 빠르게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잠시 잡지사를 기웃거리다 출판사에 입사해 그 길로 돈 벌고 남편 만나고 애 낳고 애 키우는 육아 열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15년.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소설을 쓸 시간이 없는 비운의 아주머니 편집자가 되었다. 딸의 등단을 누구보다 바랐던 나의 아버지는 서른을 훌쩍 넘긴 어느 해까지도 새해가 밝으면 꼬박꼬박 '박완서 선생도 마흔에 등단하셨다'는 이야기를 덕담처럼 건네셨으나, 서로가 슬퍼져 더는 말하기도 듣기도 힘들어진 때가 오자 더는 박완서 선생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딸은, 박완서 선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십수 년의 세월 끝에 깨닫고 만 것이다.


선배나 동기의 등단 소식을 들을 때까지는 그저 조금 속상한 정도였다. 아주 약간 신기하고 기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던 후배들의 등단 소식을 들을 때에는 화가 났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앞서 나가는데, 그 사람들에겐 나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처지라 어디 화를 낼 수도 없는 우스운 꼴이었다. 짬을 내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쓰다가 언제나 포기했다. 글이, 너무 구렸다. 내가 쓴 글이 너무 구려서 혼자 몇몇 새벽에 노트북 앞에서 울었다. 그래, 포기하고 독자를 하자. 고급독자 하면 되잖아. 많이 읽고 깊이 읽으면 되지. 문학은 그 자체로 기쁘고 흥분되는 존재잖아. 이런 생각에 얼마간은 슬프지만 평안했다가, 그 또한 너무 구려서 열 받았다. 그래, 나는 정신머리 자체가 글러먹었다. 소설은 무슨 소설이냐. 망해라, 그냥. 이런 모든 생각들 끝에 언제나 내가 싫었다.


그즈음이었다. 단순히 등단을 떠나서 ‘한국문단을 이끄는 젊은 작가’가 되어버린 후배 하나의 에세이를 보았다. 글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나는 혹시나 이 글을 엮어 책을 낸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한 다리 건너니 연락처도 바로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평소대로라면 기획의도를 정리한 정중한  제안 메일을 보냈을 테였는데, 일단은 전화 통화를 한 기억만 남아 있다. 작년의 일이다.) 서로 연락 없이 지낸 시간이 오래이고, 어쨌든 나는 일로 연락을 한 데다가 무엇보다, 소설가의 길을 걷고 계시는 작가님이니까, 일단은 존댓말을 쓰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아무리 대학 생활 내내 밤이고 낮이고 얼굴 스칠 때마다 담배 피울 거냐고 물어본 사이이기는 하더라도, 그래도 어떻게 작가님인데... 일단 “땡땡땡 작가님이신가요?”라고 운을 떼고 나니, 상대는 나를 “어머, 언니!”라며 반가워하는데도,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잘 지냈니?"를 연달아 말하고 났더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초라함이 밀려 올라왔다. 추후 출간 계획이 어떻게 되시는지를 높여 물었다가, “아, 그럼 당장은 안 되겠네...” 하고 혼잣말인지 묻는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애매한 종결어미를 써가며 점점 쪼그라들던 나는, “그래도 작가님이시라 말을 놓을 수가 없네요, 하하”라고 웃는 순간에 한 마리의 찌질이가 되어버렸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와아... 그래, 이게 나네. 이게 나야... 그렇게 사무실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으아아악’ 하고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나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오늘 대학 때 선배를 만나, 최근에 번역하셨다는 책을 한 권 받아 든 나는, 자연스럽게 그 후배 작가님의 근황을 전해 들었다. 그 참에 내 자존감 밑바닥에 거름 삼아 깔아 둔 저 기억을 꺼내어 얘기해줬더니 선배도 얼마나 재밌다고 웃던지. 깔깔깔 웃으며 “저 너무 모질이 같죠.” 얘기를 하던 내 눈에서 한 개 영롱한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야, 너 지금 울어?” 둘 다 더 크게 깔깔깔 웃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고인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내렸다. 아, 소설을 못 써서, 나는 나를 이렇게나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그러고 웃고 있는 내가 너무 수치스러웠다. ㅋㅋㅋ


아, 이 병을 어쩔 것이냐. 아마 소설가가 되지 못한 채로 관 뚜껑을 덮는 날까지 나는 나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어느 날처럼 내가 싫거나 밉지는 않다. 소설가가 되지 못한 시간에, 나는 내 두 아이에게 소설보다 더한 것들을 보여준 것일 테니까. 이 문장을 쓰고 있는데도 너무 초라해서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아이, 그냥 병이다, 이건. 나는 소설병에 걸렸다. 아마도 불치병 같다. 이런 내가 밉거나 싫진 않지만, 아프다. *나 아프다. 그래서 이 연재의 제목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다.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러나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말들.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서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쓴다. 써놓고 나니, 후련한 듯도. 더 초라해진 듯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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