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앞에 텐트를 펴는 이유

1. 형광팬 캠프

by 박구사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결과가 시원찮은 게 어디 한두 번이 던가.



“여기 텐트 쳐도 되나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쭈뼛거리며 물었다. 나는 사실 질문을 할 때 쭈뼛거리는 편이 아니다. 시장에서 춤추면서 군밤을 팔던 나는 얼굴이 두껍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여기가 숲 속의 캠핑장이었다면 절대 쭈뼛거리지 않았겠지만 이 곳은 여의도 한복판. MBC 앞이다. 당신도 보안요원에게 방송국 정문 앞에 텐트를 쳐도 되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면 별 수 없을 것이다.


“... 네? 뭐라고요?”


만약 그 덩치 큰 보안 요원이 헛것을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한 박자 늦게’ 인상을 쓰며 되묻는다면 더더욱.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유재석을 위해서. 나는 이곳에 텐트를 쳐야만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내 이십 대가 녹아든 회사가 넘어갔다. 간신히 이직한 곳은 일 년쯤 지나자 합병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회사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노량진에는 회나 먹으러 갔던 사람이라 공무원 시험은 전혀 몰랐고 주변에도 그쪽 방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나에게도 적용되었기에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하며 합격의 꿈에 부풀었다. 그러다 공무원 시험이 최고 경쟁률을 갱신했다는 뉴스 같은 걸 보면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그즈음 <무한도전>에서는 선거 특집이 한창이었다. 오랜 기간 무도를 이끌어온 관록의 리더 유재석과 광기의 신예,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노홍철, 가나바 당, 시민 박 씨로 나뉘어 차기 무도를 이끌어갈 리더를 뽑는다고 했다. 마침 지방 선거가 예정된 해라, 선관위까지 합동해서 선거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전국에서 투표가 진행된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험을 준비할지 말지를 고민하며 인터넷을 들락거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시험을 준비하면 합격할 때까지는 마음대로 놀지도 못할 텐데. 공부하며 지칠 때마다 떠올릴 추억을 만들고 싶다.’ 번뜩 떠오른 이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며 점점 살이 붙어갔다. 지금 바로 공부를 시작한다면, 열심히 다니던 회사가 휘청거려서 등 떠밀려 수험생이 된 기억밖에 떠올릴 게 없었다. 정신 건강에 좋을 리 없었고 뭔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평생 남을 추억으로 패배감에 찌든 머릿속을 상쾌하게 소독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전국에서 1등으로 투표하기’였다.


아마 그때는 은연중에 작은 성취감, 작게라도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유재석과 노홍철 2파전에서 유재석이 이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 비록 한 표지만 이번 선거에서 유재석이 이긴다면 그게 곧 나의 승리라는 생각. 그러나 그냥 투표만 해서는 기억에 남지도, 내 안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지도 못한다. 하다못해 친구들에게 내가 유재석이 당선되는 데 한몫했다고 말하려면 그냥 투표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야, 투표는 나도 했다.” 이런 소리를 할 게 뻔했다.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 나온 아이디어가 ‘전국에서 1등으로 투표하기’였다. 방송국 앞에서 전날 밤부터 기다리면 분명히 첫 투표자가 될 수 있으리라. 더군다나 이런 팬이라면 인터뷰 기회도 있을 테고 어쩌면 <무한도전> 멤버들을 만나게 해 줄지도 모른다.


투표 전날 밤 9시. 들뜬 마음으로 텐트를 챙겨서 방송국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40분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마음이 동동 떠서 그런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나중에는 혼자 인터뷰 연습까지 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봤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밤에 텐트를 짊어지고 중얼중얼 거리며 걷다가 가끔씩 히죽히죽 웃기도 했으니까.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여의도 MBC 앞에 도착했다. 야심한 시각에 정문을 기웃거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보안요원이 다가왔고 나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여기다 텐트를 쳐도 되는지 묻게 된 것이다.


그 보안요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선 어디론가 무전을 날렸다.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였지만, 겉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 길 건너편 화단에라도 올라가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몇 차례 무전을 주고받은 보안 요원은 내게 정문 가장 가까운 자리를 내어주었고, 텐트를 치는 사이 몇 명의 보안 요원들이 몰려와 나를 구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텐트를 치는 손이 무뎌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보다 못한 요원들이 텐트를 같이 쳐주면서, 방송국 앞에 텐트 치고 밤새는 건 아이돌 팬들 말고는 처음 본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주었다. 다들 얼마나 친절하신지 텐트를 다 치고 나서도 혹시나 투표장을 다른 곳에 설치하게 되면 바로 알려줄 테니 전국 1등을 놓치지 말라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두 번째 투표자가 왔을 때는 새벽 4시 무렵이었다. 이미 인터넷 게시판 여기저기에 방송국 앞에 텐트 친 극성 무도 팬의 인증 사진이 올라간 시점이었다. 본인도 그걸 보고 얼른 달려왔다고 했다. 본인보다 더한 팬이 있을 줄 몰랐다며 분명히 무도 멤버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인터뷰는 떼 놓은 당상이고 분명 멤버들을 만나게 될 테니 어서 멘트를 정리해 놓으라고도 했다. 아, 내게 살아생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무한도전>에 나오고 있는 내 모습이 선했다.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우울감과 패배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행복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렸고 동이 트고 나자 내 뒤에는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전국에서 가장 먼저 투표를 했다. 수많은 팬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투표장에 입장하는 것부터 촬영했고, 인터뷰도 했다. 텐트까지 동원된 투표의 열기는 여러 기사에 보도되었고 김태호 PD가 직접 나의 인증샷을 리트윗해 주기도 했다. 결국 유재석은 큰 표 차이로 리더로 다시 당선되었다.


본방송을 보면서 유재석의 승리에 나도 한몫했다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족들 앞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 방송에서는 촬영한 영상, 인터뷰가 모두 편집되었다. 단 1초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투표 당일에도 <무한도전> 멤버들은 만날 수 없었다. 뭔가 추억을 만들다 만 듯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쉽지만 별 수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결과가 시원찮은 게 어디 한두 번이 던가.

인생에 마법 같은 순간은 생각처럼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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