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광팬 캠프
투표만 해서는 기억에 남지도,
내 안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지도 못한다.
“여기 텐트 쳐도 되나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에게 쭈뼛거리며 물었다. 나는 사실 질문
을 할 때 쭈뼛거리는 편이 아니다. 시장에서 춤추면서 군밤을 팔
던 나는 얼굴이 두껍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여기가
숲속의 캠핑장이었다면 절대 쭈뼛거리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여
의도 한복판. MBC 앞이다. 당신도 보안요원에게 방송국 정문 앞
에 텐트를 쳐도 되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면 별 수 없을 것이다.
“... 네? 뭐라고요?”
만약 그 덩치 큰 보안 요원이 헛것을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한
박자 늦게’ 인상을 쓰며 되묻는다면 더더욱.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재석이 형을 위해서. 나는 이곳에 텐트를 쳐야만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내 이십 대가 녹아든 회사가 넘어갔다.
간신히 이직한 곳은 일 년쯤 지나자 합병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회사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노량진에는 회나 먹으
러 갔던 사람이라 공무원 시험은 전혀 몰랐고 주변에도 그쪽 방
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은 나에게도 적용되었기에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하며
합격의 꿈에 부풀었다. 그러다 공무원 시험이 최고 경쟁률을 갱
신했다는 뉴스 같은 걸 보면 쪼그라들길 반복했다.
그즈음 <무한도전>에서는 선거 특집이 한창이었다. 오랜 기간
<무한도전>을 이끌어온 관록의 리더 유재석과 광기의 신예, 브레
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 노홍철, 가나바 당, 시민 박 씨로 나뉘어
차기 <무한도전>을 이끌어갈 리더를 뽑는다고 했다. 마침 지방
선거가 예정된 해라, 선관위까지 합동해서 선거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전국에서 투표가 진행된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기
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험을 준비할지 말지를 고민하며 인터넷을 들락거리다 갑자
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시험을 준비하면 합격할 때까지
는 마음대로 놀지도 못할 텐데. 공부하며 지칠 때마다 떠올릴 추
억을 만들고 싶다.’ 번뜩 떠오른 이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
을 동동 떠다니며 점점 살이 붙어갔다. 지금 바로 공부를 시작한
다면, 열심히 다니던 회사가 휘청거려서 등 떠밀려 수험생이 된
기억밖에 떠올릴 게 없었다. 정신 건강에 좋을 리 없었고 뭔가 특
별한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평생 남을 추억으로 패배감에
찌든 머릿속을 상쾌하게 소독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전
국에서 1등으로 투표하기’였다.
아마 그때는 은연중에 작은 성취감, 작게라도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유재석과 노홍철 2파전에서 유재석이 이기
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 비록 한 표지만 이번 선거에서 유
재석이 이긴다면 그게 곧 나의 승리라는 생각. 그러나 그냥 투표
만 해서는 기억에 남지도, 내 안의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지도 못
한다. 하다못해 친구들에게 내가 유재석이 당선되는 데 한몫했다
고 말하려면 그냥 투표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야, 투표는 나도
했다.” 이런 소리를 할 게 뻔했다.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 나온 아
이디어가 ‘전국에서 1등으로 투표하기’였다. 방송국 앞에서 전날
밤부터 기다리면 분명히 첫 투표자가 될 수 있으리라. 더군다나
이런 팬이라면 인터뷰 기회도 있을 테고 어쩌면 <무한도전> 멤버
들을 만나게 해 줄지도 모른다.
투표 전날 밤 9시. 들뜬 마음으로 텐트를 챙겨서 방송국으로 향
했다. 당산동에서 여의도 MBC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40
분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마음이 동동 떠서 그런지 발걸음이 가
벼웠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나중에는 혼자 인터뷰 연습
까지 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봤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한밤에 텐트를 짊어지고 중얼거리며 걷다가 가끔
히죽히죽 웃기도 했으니까.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여의도 MBC 앞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정문을 기웃거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보안요원이 다가왔고 나는 쭈뼛거리며 여기에 텐트
를 쳐도 되는지 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