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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gital wanderlust Jul 26. 2020

04. 상하이

태양의 제국

https://youtu.be/yyf059psVew

태양의 제국 OST 'Suo Gan'

수능 시험 마친 날이었나. 홀가분하게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비디오 테이프로 영화를 한 편 빌려보는 것이었다. 지금 회상하자니 매우 구시대적인 전유물 같기도 하지만 당시엔 동네마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 가게가 두세 개씩 있었고, 대여료는 2천 원으로 3일 내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를 물어야 했다. 암튼 그때 빌려 본 영화는 어린 크리스천 베일이 주인공이었던 <태양의 제국>이었고, 영화의 OST 'Suo Gan'은 나의 'Favorite' 중 하나가 되었다.


OST가 인상 깊게 박혔지만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들(ET, 인디애나 존스, 백 투 더 퓨처 등)에 비해 폭망 한 작품이다 보니(스필버그 감독이 해석한 전범국 일본에 대한 편협적인 시각과 가미카제 특공대까지 미화한 장면들로) 카세트 테이프도, CD로도 OST를 구할 길이 없었고, 가끔 미니홈피 BGM으로 설정하고 싶어 검색해 봐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멜론 같은 스트리밍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유튜브를 통해 영화 OST뿐 아니라, 'Suo Gan'을 부르는 싱어들의 공연 현장까지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https://youtu.be/whKw72731L8


OST는 영국이 대영제국이던 시절 켈트족 웰리스(Wales)의 언어 웰리쉬로 된 민요로 영어가 아니라는 것도 매우 이색적이지만 지금 다시 OST 가사의 뜻을 보다 보면 또 다른 감동과 또 다른 해석으로 찾아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건 마치 또 다른 영화 '작별' OST 가사(스페인어) 번역본을 보며 음악을 듣는 기분과 유사하다. 중일 전쟁통에 부모와 생이별하여 졸지에 고아가 돼버린 주인공이지만 비행기 장난감을 좋아했던 소년은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위안과 존경심과 축복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른다. 모든 이념과 사상과 현실을 떠나 소년의 눈에 비친 모습과 마음으로.


Huna blentyn yn fy mynwes,

잘 자라 우리 아기 내 품에서,

Clyd a chynnes ydyw hon;

엄마의 팔이 너를 감싸네.

Breichiau mam sy'n dyn am danat,

따뜻한 둥지에서 아늑함을 느끼렴.

Cariad mam sy dan fy mron;

항상 새롭게 내 사랑을 느끼렴.

Ni cha dim amharu'th gyntun,

네가 잠자는 동안 위험은 없단다,

Ni wna undyn a thi gam;

아픔은 너를 비껴갈 거야.

Huna'n dawel, anwyl blentyn,

귀여운 내 아기, 항상 널 지켜주마,

Huna'n fwyn ar fron dy fam.

엄마 품에서 얌전히 자거라.

Paid ag ofni, dim ond deilen

소리에 떨 필요 없단다, 그저 바람일 뿐이야

Gura, gura ar y dor;

문에 낙엽이 쓸리는 소리란다.

Paid ag ofni, ton fach unig,

파도 소리에 겁내지 말거라,

Sua, sua ar lan y mor;

외로운 파도가 강가를 쓸어갈 뿐이야

Huna blentynz nid oes yma

잘 자라 내 아기, 둘도 없는 내 아기

Ddim i roddi iti fraw;

내 품에서 잠들어라,

Gwena'n dawel yn fy mynwes.

천사가 미소 짓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단다.

Ar yr engyl gwynion draw.

거룩한 천사가 너의 휴식을 지켜줄 거야.


여하튼 IT가 발전다 보니 다시금 이 영화의 OST를 조우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취향은 변함이 없으나 그 취향을 접하게 된 방식이(멜론, 유튜브 등) 세월과 함께 달라졌으며, 지금처럼 변하지(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어쩌면 'Suo Gan'을 듣지 못했을 것만 같다.


당시 중일 전쟁이 배경이란 건 영화를 보면서 알았으나 유튜브 <조승연의 탐구생활>에서 '영화 [태양의 제국]으로 보는 영국령 상해의 역사 ㅣ아편전쟁' 편을 통해 장소가 상하이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https://youtu.be/lP2FxGnvs-U


작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상하이에 여행 겸 방문하여, (정확히 100주년 기념일 이튿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장소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이자 기념관이 있는 '루쉰공원'을 둘러보았다.


조승연 작가가 생생히 증언해 주듯 상하이는 기대 이상(기대감은커녕 음식 걱정, 영어가 1도 안 통해 택시 타기도 힘들다, 미세먼지가 심하다, 사람이 많아 예약한 기차도 못 탄다, 불친절하다 등등으로 걱정이 많았다)의 대도시였다. 황푸강을 가운데 두고, 왼쪽엔 역사적 배경들이 말해주듯 유럽 건축 양식들로 지어진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영국 조계지로 알려진 와이탄 강변길은 유럽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게 해 준다. 특히 강 건너편엔 미래도시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고층 빌딩들의 야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여기가 내가 아는 중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교적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지역이기에 유럽을 흉내 내고 있는 아시안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와이탄 바로 뒷골목으로만 들어서도 허름한 건물들에 빨래 더미들이 널려 있다. 와이탄으로 걸어가는 초입. 강 건너엔 미래 도시가 존재하지만 코 앞에 펼쳐진 과거로 돌아간 듯한 입체적인 풍경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상하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첫째 날은 우전이라는 수향 마을로 향했는데 TV 프로그램 '베틀 트립'에서 서경덕, 딘딘, 유재환이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며, 한 때 피난처였던 자싱을 거쳐 우전에서 촬영을 마감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송을 위해 렌트한 차를 타고 자유롭게 다녔겠지만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했기에 자싱이 근처였음에도 불구하고 관광지로 유명한 우전 마을에 바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오랜 시간 끝에 도착하게 되었으나(지하철 - 비행기 - 중국 지하철 - 중국 기차 - 호텔 택시 - 도보) 기대 이상의 장소여서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은신처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중 하나였던 자싱은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독립 운동가였다가 광복 이후 월북한 인물)을 맡은 조승우가 김구 선생을 찾아갈 때 등장하는데 그곳 역시 수향 마을이다 보니 우전과 매우 닮아있다.


우전은 TV로 봤던 모습 그대로여서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고, 관광객들은 많았으나 장소와 시간이 주는 고즈넉함이 힐링이었다. 호텔 제외하곤 우전이 여행 중 유일하게 영어 메뉴판조차 없던 곳이어서 중국어 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메뉴판을 보냈으나 바로 답이 없어 그냥 주문하고 우리가 시킨 메뉴를 알려주었는데, 나중에 메뉴 잘 골랐다며 내가 어떠냐고 물어봤던 메뉴는 황소개구리라고 회신이 왔다. 나중엔 좀 느끼했으나 중국에서 꼭 먹어 보고 싶었던 동파육도 먹었고, 그때 그 순간의 행복을(여행지에서의) 다시금 누릴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확실히 시칠리아에 갔을 때처럼 로마라는 대도시보단 중국도 소도시가 주는 안전함과 사람들의 친절함이 우리나라 시골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서와 매우 유사했다. 3년 전 시칠리아에 갔을 때도 갈 때나 올 때나 로마를 경유하다 보니 하루 이틀은 로마에 머무를까 했는데 소매치기가 무서워 결국 로마는 공항 땅만 밟았다. 우전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면서 이것저것 문의를 했더니 엠마라는 그 호텔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과 출발 전 위챗으로 친구를 맺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기차 타고 도착한 퉁샹 기차역에서는 우리가 예약한 호텔 기사만 나올 줄 알았는데 엠마가 직접 우리를 맞이해 한 시간 걸리는 호텔까지 함께 해주었고 심지어 다시금 기차역에 돌아가는 길까지 동행해 주었다. 한류에 관심이 많은 순박한 엠마에게 돌아오는 날 기차역에서 팁을 건네자(너무 헌신적이고, 친절하고, 호의적이라 당연히 팁을 원할 거라 생각했다) 호텔비에 다 포함되어 있다며 결국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팁이 없으면 신경질을 내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 직원들과 팁을 당연시 받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 중국 직원들의 상반된 모습이 대조되면서 조금은 짠하기도 하고, 갑자기 그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엠마가 생각난다. 

개인적으로 시끄럽게 화내는 듯한 억양을 사용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잘 안 해 관리 아저씨가 막 뭐라 하시면 그제야 편의점에서 종량제 봉투를 사오고(나 사는 곳만 해도), 미세 먼지까지 보내는 중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해 어느 나라나 그렇듯, 이건 그 나라 국민성에 대한 편견보단 엠마 같은 사람 중심으로 봐야 된다는 정설을 깨닫게 해 준다. 당장 우리나라 사람들만 해도(내일 출근해서 만나게 될 팀 사람들만 해도) 인간성이 얼마나 다양한가. 도시 사람은 전부 여우고, 시골 사람들은 전부 순박하다는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여하튼 작금의 시대에 코로나는 또 다른 관점에서 국가 대 국가 이슈로 바라봐야 되는 부분이며, 이 건 국가, 인종, 종교 심지어 소도시 등을 다 떠나 중국 우한이 발원지라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인지해야만 한다. 중국은 총성 없는 전 세계 3차 전쟁을 일으켰다. 최전방에서 고전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은 군인이 아닌 의료진들이고, 전 세계 전쟁 사망자는 오늘 기준 약 650,000명이며, 실제 중미 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 중이다. 나는 전쟁 피난민까진 아니지만 매일 마스크 쓰고 하루하루 보내는 일상이 점점 더워지다 보니(업무로도 지치는데) 힘겹고, 마스크 쓰지 않고 침 튀기며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피곤해진 것이 팩트다.


작년에 가본 상하이는 또 가보고 싶은 장소였다. 이 전쟁 같은 시기가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을 때쯤 다시금 가보고 싶다. 나에겐 슬프고도 아름답고 행복한 장소였다.


https://youtu.be/0sOfhuuMw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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