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이 시작이었다
처음 그를 만난 건,
하윤이가 돌을 갓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은채는 그날도 마트 앞에서
할인 스티커가 붙은 분유통을 쳐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계산대에선 카드 결제가 몇 번 튕겼고,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슬쩍 명함을 건넸다.
“후원 같은 거예요. 어려운 엄마들 도우려는 시스템.”
그는 조용히 말하며 명함을 내려놓고 말없이 돌아섰다.
은채는 한참 동안 그 종이를 바라봤다.
그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어디선가 미리 짜인 대본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그날따라
유난히 편안하게 들렸다.
그때 은채는 일을 그만둔 지 1년 반이 지나 있었다.
하윤이 출산과 동시에 육아휴직을 썼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회사엔 은근한 냉기가 감돌았다.
“복직 타이밍이 좀 애매하네요.”
“지금은 인력이 꽉 차서…”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밀려났고,
남편은 육아에 점점 무관심해졌고,
결국 말없이 짐을 싸서 나갔다.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은채는 처음엔 육아 블로그를 시작했다.
소소한 일상, 이유식 레시피, 기저귀 브랜드 비교.
밤마다 후기와 공동구매 홍보 글을 올리며
조회수를 모았다.
하지만 가난은 클릭 수보다 빨랐다.
‘조회수 1200’이라는 숫자 뒤에,
하윤이의 울음소리가 겹쳤다.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아기 기저귀 값도 없어요.”
그 말은 댓글이 아니었다.
그녀가 실제로 타인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첫 택배가 도착한 날,
박스 안에는 비타민 샘플, 아기 물티슈,
그리고 작은 노트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노트엔 딱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영상 3분 20초에 샘플 제품 등장.
단어는 'Hydrangea'.
은채는 그걸 ‘광고 가이드’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정말 그랬다.
그냥 유료 협찬 정도로 여겼다.
Hydrangea.
그 단어가 ‘장소’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세 번째 촬영 이후였다.
“그냥 한 번이면 돼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택배는 계속 도착했고, 제품은 늘 새로웠고,
돈은 정산보다 빨리 입금됐다.
협찬은 끊이지 않았고, 구독자 수는 멈추지 않았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왔다.
하윤의 이름을 기억했고,
그녀가 쓰는 제품을 사고,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처음엔 기뻤다.
그다음엔… 무서웠다.
정우가 다시 나타난 건 어느 날 밤,
한 카페 구석이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노트북을 펼쳐 놓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조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축하해요. 이제 10만이네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축하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걸
은채도 알았고, 그도 알았을 것이다.
“다음 건, 좀 더 중요한 건이에요.”
그의 말 너머,
카페 벽에 붙어 있던 가족사진 광고 속
아이의 미소가 은채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의 손목이 차갑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