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어느덧 50을 넘어 힘차게 60으로 향하고 있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말에도 말꼬리가 있듯이 글에도 글꼬리가 있다. 왜냐하면 글꼬리를 물고 물고 하니 글이 생각나고 다시 생각 하게 만든다.
말꼬리는 꼭 싸움을 하는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싫어한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말꼬리를 잡고 서로 늘어지고, 회사에서도 말꼬리를 잡고 누가 ‘어떠고’ ‘저떠고’로 시작하여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꼬리로 짜증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이것으로 인해 감정도 않좋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글꼬리는 말꼬리와 다른 묘한 마력이 숨어있다. 글에 꼬리를 물고 가다보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생각이 나오기 마련이다. 인류를 편안한 생활로 이끈 이들이 아마 과학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이 글꼬리를 잡지 않고 머리속에만 담아 놓았다면 이런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하루에 2만에서 5만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글은 이렇게 많이 쓰지 못할 것이다. 많이 쓴다고 해봐야 1만글자나 쓸수 있을까? 단어는 500단어를 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말보다 짧은 글에는 삶의 위로가 있고 희망이 있고 말로 하지 못한 분노를 표출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말 많은 사람보다 글을 잘쓰는 사람이 더 현명한 것 같다.
살아 가면서 글에 심취되었던 이들이 우리 조상중에도 얼마나 많은가. 멀리는 세종대왕부터 가까이는 정약용 선생까지 그들의 글 한 단어, 한 단어가 지금 우리를 얼마나 행복 하게 하는가. 만약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한글’을 쓸수 있었겠는가. 아마 아직도 우리는 어려운 한문을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또 정약용 선생이 아니었다면 ‘목민심서’ ’흠흠신서’ 와 같은 책이나 거증기를 볼수 있었겠는가. 이런 분들이 한 자, 한 자 기록할 때 아마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글꼬리를 잡고 늘어졌을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명도 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도덕적이며 우리의 인성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책도 썼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말꼬리를 붙잡고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글꼬리도 매일 일상생활에서, 회사에서, 때로는 SNS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도 발전하고 서로가 발전하는 귀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요즘 세대간에 사용 하는 단어나 표현이 다르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옛날에도 그런 걱정을 하는 분들이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글꼬리에 어떤 단어를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글꼬리를 잡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된다. 말꼬리 보다는 글꼬리가 나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만들고 있고, 나를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베트남 어느 시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