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로 보는 영화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는 영화 평론가이자 SF작가인 듀나가 영화 속 진부한 전개, 즉 클리셰에 관한 본인의 관점을 소개하는 책이다. 모두가 알법한 영화와 그 전개들을 사전처럼 나열하고 이에 관하여 창작가로서의 주관이 더해지는 점이 매력적이다.
감동적인 연설
코미디 영화에서 '감동적인 연설'의 트릭은 아직도 쓰이는 무기입니다. 갑자기 엄숙한 음악이 나오자 주인공이 심각한 표정으로 뚱딴지같은 소시를 늘어놓는 코미디 트릭은 정말 어디에나 있습니다.
기억상실
기억상실 소재의 작품들은 수많은 대중적인 픽션의 사랑을 받으며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참으로 로맨틱한 도구가 아닌가요? 로맨틱할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기도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탐구를 이처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트릭은 많지 않습니다.
바뀐 선물
이 설정이 애용되는 진짜 이유는 이런 실수가 프로이트식 실수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똑바로 살아라 2002-2003>에서 정명이 여자친구 려원에게 준 목걸이 선물을 이성친구 정윤이에게 준 이유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정말로 정윤이를 여원보다 더 생각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거죠.
발표회 결석
가족이라는 대상이 새로운 의미를 얻어가는 현대 미국을 사는 부모들은 모두 아이들의 발표회를 빼먹는 데에 조금씩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에겐 아주 신기해 보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아이들의 과외활동은 그렇게까지 활발하지 않으며 의미도 미약합니다. 학교는 그냥 공부공장이죠. 둘째로 우리 부모들은 그런데 빠지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직장인들 대부분 그렇겠죠, 애들이 시합에 나간다고 감히 일자리를 뜨다니요, 사치스럽기는! 우리는 여전히 슬픈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수다쟁이 악당
생각해보세요. 이 과대망상증 환자인 악당은 일종의 예술가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자기 예술작품을 과시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다른 예술과는 달리, 범죄는 자신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에겐 필수적인 비평가의 칭찬을 받을 기회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이 경우, 누가 비평가일까요? 당연히 주인공입니다.(체스터튼도 말했지요. "범죄자가 예술가라면 탐정은 비평가에 지나지 않지.") 그렇다면 악당들이 주인공으로부터 "이 사악하고 못돼먹고 추악하지만 영리하고 대단한 괴물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고 지당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잡혀서 죽기 일보직전이 아닙니까? 그에게 말해도 음모가 노출될 염려는 없는 겁니다.
자기 연민을 속죄라고 착각하는 남자들
문제는 이들이 그 죄책감을 폼나는 가죽재킷처럼 과시용으로 입고 다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죄보다 중요시 여겼습니다.
죄책감의 왕인 장발장은 어떻습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통을 오페라 디바처럼 과시한 적 없습니다. 그 고통을 몽땅 속에 묻어두고 자신은 말없이 속죄의 길을 걸었지요. 장발장과 같은 성자가 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죠.
"나는 야생의 것들이 자기 연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작은 새조차 얼어 죽어 나무 가시에서 추락할 때도 자기 연민하지 않는다." -D.H. 로런스'자기 연민'<지.아이.제인, 1997>
자폭장치
여기서 자폭장치는 일종의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으로 엉키고 엉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등장합니다.
책의 부제가 '재미있는 영화 클리셰 사전'인 만큼 저자는 영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 책을 통해 영화 속 숨어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추천한다. 분명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탐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