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쯤인가 반에서 심리 검사를 한 적이 있다. 검사를 진행하고 각 분류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설명해주는 활동이었다. 나의 결과는 ‘잔 다르크형’이었다. 다른 설명은 기억나는 게 없는데 ‘잔 다르크’라는 단어만 뚜렷이 기억한다. 교과수업 외 활동이 너무 재밌어서 이십여 년 전 일이 기억나는 건 아닐 테고, 열몇 살짜리에게 “넌 잔 다르크다”라는 통보는 너무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한 심리 검사는 이제 자기소개의 필수가 되어버린 MBTI였다. 성인이 되어 인터넷으로 검사해본 내 MBTI는 INFP(이하 ‘인프피’)고, ‘잔 다르크형’은 인프피를 수식하는 말이다. 무려 중학교 때 했던 검사와 같은 결과라니!
골수 인프피답게 나는 대체로 인프피에 대한 설명에 부합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되는 정의들도 있다. 다소 반항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습관이 내 기질의 어느 정도 큰 축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상대방에게 잘 맞춰주고, 자기 주관을 억누르더라도 상대를 배려하는 성격이다”라는 인프피에 대한 설명과는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가 인프피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을 들었다. 인프피는 공감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고 상대방 입장에 대입해서 생각하는 재주가 있는데,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원래 그렇다”든지 “원래 이래야 한다”는 편견이 잘 없다고 한다. 그것보다는 이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저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상황이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대입을 해보는 이들이라고 한다.
이게 바로 비판적인 사고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은 상황들에서도 왜 이렇게 분노할 때가 있는걸까 했던 게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난 삐뚤어진 게 아니라 이입을 잘하는 것뿐이야!
상대에 대입하고 감정이입을 했을 때 부당한 감정을 느끼면 이를 고치고 해결하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영웅적 마인드’ 나 ‘잔 다르크’ 등의 수식어가 붙는 듯하다. 인프피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랴.
사실 인프피여서든 아니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은 앞으로도 어디 가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단순히 불의에 타오른다거나 씩씩대기보다는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가려고, 그리고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과 면담하는데 진로 얘기를 할 줄 알았던 선생님이 앉자마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ㅇㅇ아, 먼저 선생님을 왜 싫어하는지 얘기해주면 안 될까?”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나눌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아셨을까? 예전의 나를 생각하건대 아마도 내 생활기록부를 쥐고 있는 선생님이건 아니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숨김없이 반항적인 눈빛으로 쏘아붙였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강렬한 눈빛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잔 다르크가 적군을 째려본 것만으로 역사책에 오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이입하는만큼 내 감정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있는 인프피가 되어야지.
ps. MBTI에 과몰입하는 것도 인프피의 특징이라더라. 지금 내가 쓴 글을 보니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