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s-osophy

by 분노의질주


미드 모던 패밀리를 보면 다정하고 엉뚱한 아빠 필 Phil이 대학교 기숙사로 첫 독립을 하는 딸 헤일리에게 <Phil’s-osophy> 라는 책을 써서 건넨다. 이 책에는 필이 헤일리에게 전수하고 싶은 삶의 지혜들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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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st amazing things that can happen to a human being will happen to you if you just lower your expectations."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방법은... 너의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Success is one percent inspiration, ninety eight percent perspiration and two percent attention to detail." (성공은 1퍼센트의 영감, 98퍼센트의 노력 그리고.. 2퍼센트의 꼼꼼함으로 이루어진다.)

인용하자면 위와 같은 말들이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문장들이지만 어떤 힘든 순간에도 이 책을 펼쳐보면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도 부모님께 전수받은 철학이 있다. 너가 이런 걸 배웠으면 좋겠다고 직접적으로 전달한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함께 살다 보면 배우는 것들이었다. 최근 독립을 하면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지니 부모님의 철학을 배울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잊기 전에 직접 우리 부모님의 <Phil’s-osophy>를 기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 이건 내가 엄마에게 가장 먼저 배운 것이다. ‘어른들께 인사를 잘하고 다녀라’나 ‘두 손으로 물건을 드려라’ 같이 어렸을 때 당연하게 배우는 기본예절이 아니라, “아, 이건 내가 엄마에게 배우는 첫 번째 삶의 지혜다”라고 느꼈던 순간이기도 하다(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아마도 내가 이제는 이런 조언도 해줄 수 있는, 말이 통하는 나이가 됐다고 여겨서 얘기했으리라는 생각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민감하고 껄끄러운 이야기일수록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다.

살다 보면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원치 않는 정도로 많다는 걸 알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렸을 적부터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자세로 관계를 맺다 보니 조금 민감하거나 부정적 반응이 예상되는 이야기를 해야할 때면 며칠 전부터 끙끙대는 아이였다. 어느날 학교 선생님께 내 기준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야 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때 엄마는 위와 같은 말로 조언을 해주었다. 이제는 친구들, 동료들, 그밖에 살면서 만나는 여러 이들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할 때마다 이 조언을 떠올린다. 미리 걱정하는 습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 후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이건 아빠에게 처음으로 ‘아빠에게 뭔가를 배웠다’고 느낀 것이다.

칭찬을 바라고 행동하지 말아라.

어느날 아빠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다른 분의 층수를 물어 버튼을 눌러주었다. 그런데 내가 버튼을 누르고, 내리는 뒷모습에 인사할 때까지 이분은 나에게 한 번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왜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서운한 티를 냈더니 아빠가 그랬다. “칭찬받으려고 누른 거였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빠는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면 감사 인사가 없다고 서운해할 필요도 없지 않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나 배웠다...!” 라고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지금은 선행으로 비칠 수도 있는 행동을 할 때면 칭찬을 바라고 한건 아니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최대한 의식하지 않는다.


3. 이건 엄마 아빠가 참 비슷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던 일화다. 그리고 마음속에 따뜻하게 남아있는 조언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를 좋아해서 주말이면 종종 가장 가까운 바다인 강원도에 갔는데, 갈 때면 항상 어시장에서 생선을 사고 이를 손질해 주는 횟집에 가져갔다. 작은 바닷가에 늘어진 시장 안에는 눈에 띄는 간판도 없이 물통만 띄엄띄엄 놓여있고 물통의 주인분들이 나와 앉아계셨다. 엄마 아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으면 두분이 별다른 상의도 없이 여기서 사자, 하고 사장님께 말을 건네는 순간이 온다. 평소 같으면 작은 것 하나에도 이것저것 따지고 사는 분들인데, 가격도 신선도도 보지 않고 둘 다 동의한다는 듯이 가게를 고르는 게 의아했다. 나는 횟집으로 이동하는 길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빠 왜 보자마자 거기서 샀어? 나의 물음에 아빠는 웃으며 답했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나와 앉아계신 데로 가는 거야. 힘드시잖아.” 초장과 간장 갖고도 티격태격대는 엄마 아빠지만 이럴 땐 참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걸 느낀다.


4.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알 것 같은 지혜도 있다. 오랜 우정이나 가족 관계에서는 도움이나 호의에 상응하는 보답을 꼭 그때그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서로 빚지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관계도 오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젊은 사람들의 깔끔하고 예의 있는 우정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어른들의 우애에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서로 중요한 자리에 참석해 주고… 젊은이들의 관계에서라면 빚지는 듯한 일들도 크게 마다하지는 않는다. 뻔뻔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서로 그 마음을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꼭 필요한 때에 갚는다. 폐 끼치길 싫어해 친구 집에서 자고 오지도 못하게 했던 부모님이, 멀리 사는 고모가 매번 이것저것 담아 보내주시는 택배나 할아버지가 고생해 만든 음식, 친구들의 인심을 마다하지 않는 걸 보며 이렇게 서로 빚지며 고마움이 오가는 시간으로 관계가 더 단단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이건 내가 두 분 옆에 있으면서 배워서 체화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맛있게 먹은 가게에서는 나올 때 그 기분을 전달하라. (덤으로 “아주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기분 나쁘지 않게 전해도 된다.”도 있다).

우리 엄마 아빠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을 보면 참 단골 가게가 많다. 예전에는 그냥 시간이 쌓여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켜보니 눈치보지 않고 말을 건네고 기분을 전달하는 어른들의 솔직한 호탕함 때문인 것 같다. 엄마 아빠가 하는 것처럼 나도 이제는 맛있게 먹은 곳에선 꼭 크게 “맛있게 잘 먹있습니다~”라고 외치며 배를 두드리며 나와야 마음이 편하다.


6. 이건 작년에 배운 것으로, 가장 따끈따끈한 교훈이다.

살면서 아랫집의 따가운 한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이사를 갈 때 감사 인사를 전해라. 중요한 것은, 아랫집을 본 적이 없을수록 더.

작년에 집을 이사하면서 엄마가 작은 선물을 챙겨 아랫층에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간다길래, 여기 오래 살면서 아랫집이랑 별로 교류도 없지 않았어? 라고 했더니 그렇기 때문에 더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우리집은 식구도 많고, 생활 소음은 있기 마련인데, 지금까지 껄끄러운 교류가 없었다는 건 그분들이 그냥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기 때문일 확률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 엄마의 명언 중에 <필-로소피>처럼 웃겼던 것도 있다.

노화를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젊게 생각하고 젊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반대의 효과가 나타난다.

이 말이 웃긴 이유는 엄마가 엄마보다 10살 더 많은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8. 가장 실용적인 조언은 이것이다.

여행 준비는 여권과 신용카드만 있으면 다 챙긴 것이다.

극단적 P의 성격이 타고난건지 부모님과 살면서 생긴 성향인건진 모르겠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물려받은 건 맞는 듯하다. 여행 가방을 닫으며 “다 잘 챙겼나?”라고 할 때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실 저 문장이 품고 있는 속뜻은, 세상엔 그렇게 크게 걱정할 가치가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인 것 같다. 결국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거나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것.


엄마 아빠가 이걸 보면 삼십 년 조금 넘도록 배운 게 열 개도 안 되냐고 기가 차다고 하시려나? 배운 게 너무 많아서 추리기가 어려웠다고 해야겠다. 적다 보니 나와 비슷한 시간동안 같은 어른들과 살았던 언니와 남동생은 어떤 교훈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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