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저혈압과 찬 몸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내 주치의 격인 언니는 맹물보다는 차와같이 조금 짭짤한 물을 마시라는 처방을 했다. 인터넷으로 차를 주문하려고 보니 내가 하루에 마실 수 있는 액체의 양은 한정되어 있고, 기왕 마실 때 최대의 효율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보리차, 메밀차, 옥수수차 다 비슷해?
“아 그건 또 달라? 그럼 이거랑 이것 중에는?”
“아니다 언니, 그냥 제일 좋은 걸 말해줘. 내가 딱 하나만 마신다고 하면 무슨 차야?”
이건 내가 자주 하는 짓이다. 내가 정작 해야 할 일은 날마다 건강하게 먹고 커피와 술을 줄이고, 꾸준히 적당한 운동을 하며 혈액순환을 기르는 습관을 만드는 것인데, 나는 “딱 하나만 마셔야 한다면 무슨 차야?" 같은 멍청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요행을 자주 바라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최근 유튜브나 인스타에서 거리의 중년 혹은 노년의 사람들을 붙잡고 “30살의 나에게 딱 한 가지의 조언을 해준다면 뭔가요?”과 같은 질문을 하는 영상들이 자주 보인다. 독서에 관한 콘텐츠라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딱 한 권의 책은?”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처럼 거의 전 분야에서 ‘딱 한 가지’를 전수 받고자 하는 제목들이 인기가 많다. 소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딱 한 가지 생활용품이나 옷을 추천해 주는 콘텐츠들도 많이 보인다. 솔직히 우리는 다섯 종류의 청소기나 세 종류의 화장실솔, 네 종류의 회색 스웨터를 갖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런 흐름을 보다 보면 소비재 분야에서 일하는 나는 가끔 우리가 만드는 것의 종착지도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소위 국민템, 꾸준템같은 물건을 만드는 것, 나 같은 사람을 위해 ㅇ차 ㅇㅇ차 ㅇㅇㅇ차를 모두 제치고 ‘이것만 마셔도 되는 차’를 만들어야 하는 일 말이다.
이런 압축된 팁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뭔가를 차근차근 스스로 알아볼 시간을 갖는다는 건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시행착오에 쓰이는 시간은 아깝게 여겨진다. 느리게 깨닫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받고, 정답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는 것은 똑똑한 일이다.
최근에 나는 음악 디깅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디깅은 이와 정반대로 효율이 굉장히 낮은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취향의 곡을 듣기 위해서는 나랑 상관없어 보이는 플레이리스트를 다섯 개쯤 들어야 한다. 그래야 귀하고 소중한 세 곡 정도를 얻을 수 있다.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다는 행위 외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음악 디깅은 누구에게나 꽤 공평하다.
특히 명동 근처에 살면서는 회현역 지하상가에 자주 방문해 사장님들과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발품을 팔면 귀한 음악 한 장을 찾을 수 있었다. 사장님은 이 레코드 저 레코드를 펼쳐놓고 플레이어 위에 얹으며 레코드나 음악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소득 없는 일에도 시간 쓰기를 신나하는 젊은이라는 인정을 받고 나면 그때부턴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팔지도 않을 레코드를 자랑 겸 귀호강 삼아 틀어주시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팔 생각도 없는 레코드를 어렵게 찾아 꺼내 들려주는 것만큼 효율 없는 활동이 어디 있나 싶다. 또, 최근엔 레코드 바에 종종 드나들며 다양한 디제이들이 트는 여러 희귀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레코드 컬렉션을 슬쩍슬쩍 구경하기도 한다. 이역시 한참의 즐거운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음악 디깅은 물리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는 점에서 “딱 한 가지”와 같은 질문에 정 반대에 있는 행위인 것 같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시행착오와 고민의 시간을 줄여줄 수 있는 큐레이션의 역할이 더 강력해지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시도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게 되고 두루 듣지 못했을 것이다.
‘딱 한 가지’가 궁금해지는 조급한 마음이 들 때,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발견들을 떠올리면 시행착오에 썼던 시간과 비용에 조금 더 관대해진다. 헌책방이나 빈티지 숍을 구경하면서 숨겨진 보석(hidden gem)을 발견하는 재미를 놓치지 않게 된다. 몇 시간의 허탕 끝에 마음에 드는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누군가가 정해주는 최고의 회색 스웨터를 살 때보다 값지다는 걸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