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램프

by 분노의질주


엄마의 MBTI를 모르지만, 엄마가 T인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확실하다.

이를 증명하는 몇가지 대화를 나열해본다.


(1)

다이어트를 한다고 푸짐한 샐러드를 차려먹는 나를 보며 엄마가 흘리고 간 말.

"00아, 코끼리도 채식하는 거 알지?"


(2)

출산과 양육을 추천하는지, 엄마를 붙잡고 정말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도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하나만 낳아. 처음엔 뭐든지 재밌고 신기하고 그런데, 그 다음부턴 재미 없어. 하나만 낳아."

나는 삼남매 중에 둘째다.


(3)

가족과 건강한 거리두기를 잘 하는 외할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나의 말에.

"맞아, 우린 좀 너희 할아버지처럼 사는 법을 배워야해.

이제부터 지나친 공감과 걱정은 사절이야 서로."


이런 엄마이기에 최근에 있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함께 어딜 가던 중 엄마가 차를 세우고 내게 스타벅스에 가서 사이렌 오더로 주문한 커피를 받아오라고 했다. 핸드폰을 받아 앱에 저장된 닉네임을 확인해보니 “요술램프”였다. 나는 직원의 입에서 요술램프가 불리기를 기다리면서 적당히 엄마의 실명과 비슷한 닉네임으로 설정을 바꿨다. '하늘물고기', '은빛여우', '차가운구름'처럼 당연히 자동생성된 한글 닉네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로 돌아와 뿌듯하게 이야기하니 엄마는 '요술램프'가 본인이 설정한 닉네임라고 했다. 난 그제서야 깨달았다. 엄마의 이름은 '진희'. 알라딘의 '지니(Genie)'를 생각하고 요술램프라고 지은 거였다..!

이런 엄마의 엉뚱하고도 귀여운 (하지만 나에겐 너무 낯설고 희귀한)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한 나를 원망하며 다시 바꾸려고 하니, 열흘 후에나 원래의 닉네임으로 바꿀 수 있댄다.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나보다.


엄마 미안, 열흘 후에 꼭 다시 요술램프로 바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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